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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6] ‘작곡가 이시우’<눈물 젖은 두만강> 작곡배경, 학력과 경력 등 새로운 사실 밝혀져
거제타임즈  |  geoje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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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4.22  21: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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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는 거제를 빛낸 인물들을 찾아 소개하거나 고인이 된 분들에 대해서는 인물 검증 또는 객관적 자료에 의거해 살아 온 생애를 소개한다. 또 현역으로 활동 중이거나 거제시민을 위해 봉사한 공적이 있어 귀감이 되는 사람들은 시민들의 추천에 따라 시민들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정파나 시류를 떠나 본사가 선정하는 기준은 남.여.노.소, 직위고하를 불문하고 가능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편집자>

거제시는 거제를 빛낸 인물과 나라와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의 발굴과 조명사업으로 시인유치환 선생의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 양달석 화백 그림비, 성파 하동주 선생의 묵적비, 향파 김기용선생의 애란비와 홍준호 시인의 시비 등의 건립으로 향토 예술인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작곡가 이시우씨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노래해 국민가수로 떠오르면서 1980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던 가수 김정구씨와는 달리 작곡자인 이시우 선생은 고향에서 조차 흔한 작곡비 하나 없어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노래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소원하며 민족정서를 살려내고 조국강산을 애찬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가 강하게 담겨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가 거제출신 이시우선생에 대해 최근에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을 바탕으로 집중 재조명 해본다.

출생 그리고 학력과 경력
민족의 애창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한 이시우(李時雨) 선생은 거제사람이다. 호적등본상에 그의 본명은 이만두(李萬斗)로 기재돼 있다. 그는 1913년(일제치하 대정2년) 11월 4일 거제면 남동리 45번지(현 삼성전자 거제대리점옆)에서 부친 이경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8년 거제초등학교(19회)를 졸업(학적부에는 창가에 소질이 있다고 적어 놓았음)한 그는 한문수학을 마치고 가족을 따라 경남 창원군 국산리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그 이후 만주하얼빈상업학교(1932. 4.1~1936. 3.10 )와 만주국립대학(1936. 4.1~1941. 3.10)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전신인 일본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전문부(1941. 4.1~1941. 12.31) 법률전공으로 졸업했다.

일반경력으로는 매일신보사 하얼빈지국 근무(1941년),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 근무(1941~1945)에 근무하다가 1945년 해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내무부장관촉탁(1948년), 대한반공인천시연맹 특무국장(1949), 부산시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전부 차장(1950), 경상남도비상사태태책위원회 선무과장(1950), 치안국 지전사 주임 근무를 시작으로 경기도 부평 형사주임(1954)으로 재직하다 면직, 이후 1958년 특채로 경상남도 동부산 경사근무를 거쳐 전남함평 주임을 끝으로 퇴직했다.

면직이후 특채되기 전 기간에는 대한건설공사대표와 국제산업여신주식회사 조사국장, 국제레코드제작사 부사장(1957)을 지내기도 했다. (여태까지 거제초등학교졸업이후의 학력은 밝혀지지 않아 명치대학 작곡가를 졸업했다고 알려져 왔다. 위의 학력과 경력내용은 1951년 치안국 지전사로 발령을 받을시 제출한 이력서를 둘째아들 이홍장의 장남 손자 이봉희씨가 2009년 4월 9일 전남경찰청에서 발급받은 경력증명서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짐).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 동기와 배경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고(故) 김정구씨의 구수한 목소리로 만인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 노래는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한이 배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북한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2005.5)는 이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북한은 이 노래를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
 

   
 

국민가요로 일컬어지는 이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은 1930년대 중엽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 중이던 극단 `예원좌'의 작곡가 이시우씨가 지린(吉林)성 도문(圖們)시의 한 여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1935년 어느 날 여관 뒷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 두 그루를 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관집 주인이 그 나무는 자신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 고향에서 떠가지고 와 1919년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씨가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을 구상하며 잠을 못 이루던 그날 밤 옆방에서 비통하고 처절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그 여인의 남편과 여관집 주인은 친구 사이인데 독립군 활동을 하던 남편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으며 그날이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두만강 가에 나간 이씨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고 그 곳에서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사연을 이야기 해주자 그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이씨가 곡을 붙였다고 잡지는 밝혔다.

이렇게 창작된 노래는 극단 예원좌의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를 시켜 공연 막간에 부르도록 했고 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씨는 김용호 시인에게 부탁해 노래가사를 다듬고 선율을 완성해 고(故) 김정구씨의 노래로 OK레코드사를 통해 취입하게 됐다. 레코드에는 작사자가 김용호로 올라 있다. 따라서 잡지는 이 노래가 한명천 원작, 김용호 개작, 이시우 작곡이 정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명천은 1940년대 후반 북한정권 초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그의 대표작 `북간도'는 북한에서 아직도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문학사에서 `2대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
 

   
 


작곡활동과 회상
이시우 선생은 퇴직이후에도 작곡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주요 작곡 작품으로는 눈물 젖은 두만강 외에 섬 아가씨, 눈물의 국경, 타향술집, 봄 잃은 낙동강, 님 없는 거제도, 인생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진도 아가씨 등을 발표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 국민가요로 떠올리게 된 동기는 1964년에 방송된 KBS 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 5분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흘러나오면서 본격적인 국민가요로 불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작곡가 이시우 선생의 이름이 되살아났다.

어린 3삼매를 돌보며 달동네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작곡활동을 계속하던 이시우선생은 1975년 1월(음력 1974년 12월 12일) 추운 겨울 하얀 첫눈이 내리는 날 집으로 귀가 하던 중 교통사고로 한양대학교 영안실에서 쓸쓸히 세상을 마감하고 인천의 용화사에 안치돼 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노래해 국민가수로 떠오르면서 1980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던 가수 김정구씨 와는 달리 세상을 떠난지 25여년이 된 작곡자인 이시우 선생은 고향에서조차 흔한 작곡비 하나 없는,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다.

이시우선생의 둘째 자부는 “남편이 철없이 아버지 작곡사무실(당시 을지로 5가에 위치)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당시 3남매를 데리고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닐 처지인데도 돈이 없을 때에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둘째아들에게 생활비를 주는 감성이 여리고 자녀들에 대한 책임이 강한 자상한 시아버지 였다”며 당시를 회고 했다.

작곡비건립 및 기념동산 조성 시급
거제면 번영회(회장 옥영실)는 노래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소원하며 민족정서를 살려내고 조국강산을 애찬하는 우리민족의 고유정서가 강하게 담겨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가 거제출신 이시우선생에 대해 최근에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을 바탕으로 25주기를 맞아 노래비건립 및 기념동산 조성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기념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거제면에 거주하는 강 송씨는 “고향이 거제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작곡비 건립과 기념동산 건립추진이 미흡한 것은 가수를 내세워 가요제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관광 상품화에 성공한 인근 진주와 목포시와 비교되고 있다”며 “행정당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과 관심의 부족을 지적하며 아쉬움이 더한다며 하루빨리 작곡비건립과 기념동산을 조성을 통해 민족정서의 재발견과 민족정신의 자각을 통해 이시우선생의 예술혼을 일깨우고 높은 뜻을 가슴에 남기며 거울로 삼고 후대에 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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