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멍에련가 거제예술랜드 대표 능곡 이 성 보 가을 가뭄이 심하다. 길 건너 동부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힘차게 물을 품어 올리던 분수의
▲ 거제예술랜드 대표 이성보 씨
구조물이 드러났다. 뼈대만 남은 구조물은 보기가 너무 건조하다 못해 처연하기 조차 하다. 가뭄으로 부황기가 완연한 잡초와 그 위를 나는 때지은 고추잠자리의 색감 대비가 눈길을 붙잡는다.
늦더위 때문인지 예년보다 감들이 빨리 익는 것 같은데 하나같이 씨알이 잘다. 20여 그루의 단감나무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씨알이 잘다. 누가 감의 살이 불을 때까지 계속된 장마탓이라 귀뜸해 준다. 그렇다고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고만고만할까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 8월말 이곳에 있는 씨펠리스 호텔에서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있었다. 성화에 못이겨 참석해보니 몇 분의 국회의원이 단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엔 남해 하동을 지역구로 둔 여상규의원도 있었다. 1부 행사인 축사가 끝나고 본격 토론회가 시작되면서 객석으로 자리를 옮긴 여상규의원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한 20수 년전에 골빈당 차를 타고 호남지방으로 난을 캐러 가신 적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수원지법 모판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의 주선으로 같이 갔드랬습니다” “제가 그날 동행했던 골빈당 당수 아무개입니다” 국회의원보다는 판사가 어울리는, 아니 선비 같은 그가 얼굴이 온통 주름 투성이가 되도록 활짝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골빈당’은 어줍잖은 나자신과의 약속으로 인해 생겨났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란 ‘10년 동안 휴일마다 채란길에 나서리라’란 다짐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전에 이 ‘난과 생활’지의 ‘한국란 채집기’에서 이를 밝힌바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을 한다. 대체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약속이 많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내와 많은 약속을 했다. 헤아려보면 지키지못한 것과 지킨 것이 얼추 반반정도 되지 싶기도 한데 지키지 말았어야 할 약속이 하나 있었다.
40초반에 시작되어 6년간 계속된 필자의 ‘蘭石展’을 치름에 있어 비용조달이다 손님접대 등에 학을 땐 아내는 아예 전시장을 마련하여 실컷 하도록 주문했다. 물론 농반진반이다. 과천에다 ‘능곡재’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양이 차지 않아 좀 크게 차려 볼까 궁리하던 참이었는데, 이때 쓰는 말이 不敢請이언정 固所願이라’가 아니던가.
얼씨구나.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아내와 약속했다. 그래서 시작한 ‘거제자연예술랜드’다. 15년 세월에 얼마나 신산을 겪었는지, 모르긴 해도 골백번을 후회를 했지 싶다. 골백번은 만번이다. 약속을 두고 회자되는 말로 미생지신(尾生之信)이 있다.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꼭 지키는 신의 있는 사나이였다. 어느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장소에 나갔으나 왠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은 ‘조금 더 조금 더’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 결국 교각(橋脚)을 붙잡고 버텼으나 결국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DJ 전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던 날 가까운 곳에 있는 ‘거원’에서 거제난우회 단합대회가 있다며 고문인 나를 불렀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닭백숙이랑 음식이 푸짐했다. 자리를 파하고 일어서려는데 집주인인 정병문 선생이 검은 빛의 액체가 담긴 과실주용의 커다란 패트병을 나에게 건네었다. 얼떨결에 받고보니 패트병 속엔 대충 헤어라보아도 백여마리가 넘는 말벌이 들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말벌주다.
놀라 쳐다보는 나에게 ‘일전에 이선생님 건강이 좋지 않다기에 말벌주를 드린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을 지키는 겁니다’ 세상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벌에 혼쭐이 난 적이 있었기도 하려니와 그 놈의 용맹과 맹독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생을 두고 장자(莊子)는 ‘쓸데없는 명목(名目)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을 모르는 놈이다’하고 그 어리석음을 규탄하면서 이는 신의에 얽매인데서 오는 비극이라 표현했는가 하면, 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라 칭송했다.
풍진 세상이란 오늘날에 미생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생각에 따르는게 좋을 듯 하다. 난우에게 고가의 명품을 분주해 주기로 약속하고는 미적거리는 애란인도 있을 줄 안다. 가을이 저물어 갈 즈음 분갈이를 하거든 미련없이 뚝뚝 쪼개어 분주의 약속을 지키도록 하자. 고가의 명품이 어찌 아깝지 않으리오만 마음은 천고(天高)에 걸린 구름처럼 가벼워질지니. <이성보/거제에술랜드대표/전 거제문협회장/시조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