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품격 
                                                                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 능곡  이 성 보

가는 계절이 아쉬웠는지 꽃샘 추위에 폭설까지 난리를 피더니 앞산엔 진달래가 벙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춘분이 목전이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던가. 많고 많은 꽃 중에 봄꽃이 진정 아름다운 건 추위를 견딘 강인함 보다는 계절을 알리는 사명감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보춘화, 봄의 전령이 주는 감동에 3월이 한층 의미를 더한다. 달포 전에 남해의 하준호라며 전화가 걸려왔었다. 이름이 가물가물하여 뜸을 들였더니 후레쉬로 소심을 캔 사람이란다.

금방 누군지 떠올랐다. 필자의 졸저 ‘난향이 머무는 곳에도’에 실려있는 바로 ‘후레쉬로 캔 소심’의 주인공 하준호 선생이다. 흰 할미꽃을 불리었는데 몇 사람에게 분주하다 내가 생각나 물어물어 전화하게 되었다면서 몇 뿌리를 분양해 주겠단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에 팻트병을 잘라 수태로 감싼 세 뿌리의 할미꽃을 택배로 받았다. 그는 약속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한 말을 실천했다. 20여 년 전의 그를 오래 떠올렸다.
사람들은 식언(食言)에 대하여는 가차없는 비판을 한다. 식언은 자기가 한 말은 먹는다는 것으로, 한 말을 없었던 것처럼 도로 삼켜 버림을 일컫는다.

식언은 서경(書經)에 처음 나온다. 중국 상고시대 은(殷)나라의 탕(湯)임금은 하(夏)나라 폭군 걸왕(桀王)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참다 못해 제후(諸侯)의 신분이면서 천자(天子)인 걸왕을 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켜 자신의 근거지인 하남성(河南省) ‘박’땅을 출발하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소. 내 말을 의심치 마시오. 나는 내가 한 말을 삼키지 않을 것이오” 근간에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이 곧잘 부정된다. 말을 하지 않고는 자신을 적절하게 알릴 수가 없기에 금언도 자기PR 시대엔 색이 바래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말을 삼가라는 얘기일 뿐이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과 함께 ‘신언서판(身言書判)’도 퇴락하고 있다. 신언서판은 전통적으로 한 사람의 능력과 인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고 특히 선비나 벼슬아치에 있어서는 절대적 기준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자판에 글쓰기가 밀려나면서 그 기준도 빛이 바래지고 있다. 언(言)을 두고 말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말의 내용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말(言)과 몸(身)이 합해진 신언은 몸가짐이요 처신이다. 신언은 말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말은 의사전달의 수단인 경우가 보편적 특성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가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세계를 움직이고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풍도(風道)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얼마나 식견이 탁월하고 재주가 많었던지 오왕조, 팔성, 십일군(五王朝, 八姓, 十一君 : 다섯 왕조, 여덟 성을 가진 열 한명의 임금)을 모신 장수 재상이었다. 아랫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영화를 누린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 하여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대답했다. 구시화문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말의 신중성을 표현하는 말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과언다문 민행신언(寡言多聞 敏行愼言)’ 즉 말은 적게 하고 많이 듣고 행동은 민첩하고 말은 신중히 생각하여 하라고 했다. 조선조 연산군 때 표연말(表沿沫)이란 문신이 있었다. 성종 때 문과 급제하였고 홍문관 겸 예문관 제학이던 그는 연산군이 놀기를 좋아하여 한강에서 배를 타고 용산까지 왕래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극구 말려왔다.

“육로로 행차하시면 편안하고 안전하온데, 어찌 위험한 수로를 택하시나이까?”하고 어느 날은 배를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연산군은 화가 나서 사공을 시켜 물 속에 떠밀어 빠뜨려 버렸다. 허우적거리는 표연말을 바라보던 연산군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공더러 건져내게 한 후 불쑥 “네이놈! 무엇하러 물 속에 들어갔다 왔느냐?” 그러자 표연말은 얼른 대답하기를 “예, 다름이 아니오라 신이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신하 굴원(屈原)을 만나러 갔다 왔습니다” 굴원은 난으로 하여금 충절의 상징이 되게 한 바로 그 굴원이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자기를 못난 초나라 회왕에 빗댄 것에 또 화가 불같이 일어났다.
“이놈, 네가 굴원을 만난 것이 사실이렸다?”
“네, 만났습니다. 시 한 수 까지 얻어 왔나이다”
“시는 무슨 시냐. 즉시 읊어 보아라”
“아봉암주투강사 이우명주저사래(我逢暗主投江死 爾遇明主底事來) :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었지만 너는 어진 임금을 만났는데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이에 연산군은 어진 임금이라는데 그만 마음이 풀어져 그를 죽이지 않았다. 우리가 일상하는 말이 전부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말은 일단 번지르하고 윤이 나야 한다. 빈약하면 외면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말 잘하는 이를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온갖 말들이 난무한다. 그런가 하면 3월 전시회가 끝나면 말들도 많지 싶다. 말은 마음의 소리라 하였으니 난의 아름다움에 취한 향기로운 말이 많았으면 한다. 말을 잘함으로써 주위로부터 인정받기보단 근본적으로 품격있는 삶,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됨이 바람이요 소망이어도 좋지 않겠는가. ‘言而人格 明倫人本’이라 하였으니 이를 지켜나가고자 나름대로 애쓰고 산다.,<전 거제문협 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