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만 아는 이야기
윤 정희
밤이 늦도록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습니다. 낮에 전해들은 바로 위 언니 소식에 내내 가슴이 아립니다. 얼마 전부터 아픈 무릎이 갑자기 심해져 두 무릎 모두 수술을 해야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삿일이 아닙니다. 자매들 중에서 궂은일에도 가장 몸을 사리지 않던 언니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생각은 날개를 달고 먼 추억 속으로 나를 실어다 놓습니다.
세 살 터울인 언니와 나는 제일 가까우면서도 앙숙이었습니다. 둘이만 간직하고 있는 일은 많고도 많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상급생인 언니는 병약한 나를 업고 십리 길을 걸어 등교를 하였던 나에게는 무척 고마운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차차로 건강해진 나는 자라나면서 사사건건 언니가 하는 일에 간섭하기 일쑤였습니다. 참으로 은혜를 모르는 철면피 막내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간 언니는 졸업할 때 즈음은 성숙한 처녀 같았습니다. 마을에서 또래가 많은 언니는 친구들과 장난도 심해 내 눈에는 그것이 항상 못마땅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들이 별도로 주는 용돈이 없었기에 어른들 몰래 쌀을 가게에 가져다주고 과자류와 바꾸어 먹었습니다. 쌀이 현금처럼 쓰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늬집 부모님 없이 직접 눈에 띄지 않으면 알면서도 눈 감아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마당에는 벼를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늘 언니한테 얻어먹어 자존심이 상했던 나도 한번 용기를 내었습니다. 벼라는 것도 잊고 얼른 책을 방에 풀어놓고 멍석 가운데 보자기를 펴고 벼를 퍼 담았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할머니의 기척소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넘어졌습니다. 벼를 다시 털어놓고 방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야단맞을 일은 둘째 치고 어린 나의 자존심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한번만 해 보고 싶었는데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언니의 잘못된 행동을 미끼삼아 늘 종알거리던 내가 이제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할머니는 그 일을 숨겨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린 내가 한 짓이 믿어지지 않으시는지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아무도 없을 때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한번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언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한번도 흥미로운 그 일을 해 보지 못하고 소녀시절이 끝나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도 언니와 언니 친구들은 신출기묘 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밤이 이슥해지면 그들은 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살그머니 숨어 들어왔습니다. 어두컴컴한 호롱불 밑에 풀어놓은 간식거리는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끼리 조금씩 모은 쌀로 왕사탕에다 비과 또 뽑기는 아예 통째였습니다. 언니들은 먹는 것에만 쓰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수예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면 소재지 가설극장에 영화나 서커스가 들어오면 형편이 어려운 친구의 관람비를 내주며 함께 보기도 했습니다.
계절 따라 가끔씩 언니 친구들은 각자의 밭에서 서리를 해 오기도 했습니다. 겁이 많았지만 나도 가끔은 언니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꼭 망지기로 세웠습니다. 혼자서 지키는 외로움과 행여나 하는 무서움에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성공을 하면 죄의식보다는 주인한테 들키지 않고 해냈다는 것에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어른들은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자라나면서 한때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학교 교육이 부족한 대신에 자녀들에게 어느 선까지 자유를 주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허용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언니도 그런 일들로 한번도 문제가 되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농촌이라고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학구열이 높아 자녀들의 재능이 되는 한 끝까지 돌보아 줍니다. 문화와 생활은 그때와 비길 수 없이 풍요롭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의 낭만적인 추억만큼은 그 시절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추억은 따뜻한 마음과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모두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고 손자들까지 본 사람이지만 과연 내 후세들이 우리만큼의 나이가 들었을 때 무엇을 추억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나름대로 그들만의 이야깃거리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았던 세상과 지금 아이들의 세상은 분명 다르고 내 추억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음에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자란 시대는 늘 부족했지만 나눌 줄 알고 배려하는 일상에서 마음은 항상 풍요로웠습니다.
시대를 따라 가느라 매일 공부에 시달리고 방학 때조차 마음 편이 놀아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지나친 어른들의 욕심에 안쓰러운 마음만 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를 만큼 유난히도 정이 두터웠던 우리 자매들, 이제는 한분 두 분 몸져눕고 바로 위 언니까지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에 속절없는 세월이 무상할 뿐입니다. 그래도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많아 언니와 나는 행복합니다. 깊어가는 밤 언니의 쾌차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렵니다.
● 약력 ●
*거제출생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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