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다 곽 호 자 손가락이 또 말썽이다. 퉁퉁 부었다. 걸레를 쥐어짜기에도 불편하다. 몸의 관절 이 말썽을
피울 것이라는 전조증이다. 약을 꺼내 삼킨다. 약은 나를 멀쩡하게 되돌려 놓는다. 나는 십 년 전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다. 이 병이 나를 찾아온 것은 충격적이었다. 가족끼리 점심을 끝내고 방바닥에서 일어서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바닥을 잘못 짚어 그러나 싶어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놀란 남편이 황급히 일으켜 세워 주었지만 한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자석이 끌어당기는 듯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부랴부랴 인근의 병원으로 실려 갔고, 혈액검사를 마친 의사가 다짜고짜 수술을 권했다.
‘류마티스 관절염’그리고 난치성이란 것까지 그때서야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술한다는 것은 께름칙했다. 난치성 질환이 수술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그 밑바탕에는 지방 병원에 대한 불신과 의술을 못미더워하는 마음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서울 G종합병원. 여의사는 내 궁금증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체의 기능에 이상이 생겨 외부의 물질에 대해 방어해야 할 면역체가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몸을 공격해 생기는 병이 바로 류머티스라는 것이었다. 제 본분을 잃은 면역체의 탈선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다. 의사를 신뢰하고 꾸준히 치료에 응했다. 수술하지 않고 바로 온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라고도 말했다. 투약의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무릎의 부기도 빠지고 뼈마디의 통증도 얼마큼은 가시었다.
그러나 1년이란 치료기간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항생제로 범벅이가 된 내장에 막을 친다는 것이 거부감을 불러 진저리가 나게 했다. 앓고 있다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대고 부산 B병원으로 병적을 옮겨 보기로 했다. 한달에 한번 서울로 오르내리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만해도 자식 뒷바라지가 채 끝나지 않았으니 돈 뭉치를 병원 수납 창구로 밀어 넣는 일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급한 불을 끄고 나서야.
불운은 계속되었다. 불청객 당뇨병이 내 몸속으로 잠입한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었다. 당뇨병은 침묵의 병인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나태해질수록 기승을 부리는 악마다. 화가 났다. 예민해졌다. 왜 이리 나를 괴롭히느냐고 자책했다.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식구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지만 쉽게 감추지 못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수두룩한 형편에 정신 줄을 놓고 있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다행스러웠다. 두 종류의 약이 술술 목구멍에 잘도 넘어갔다.
지금 내 몸속에는 두 종류의 치료제가 뒤섞여 있다. 류마티스 치료제와 당뇨 치료제. 그중에서도 류마티스 치료제인 스테로이드는 혈당을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뇨약과 같이 먹는다. 다만 통증이 심할 경우에만 먹기로 한다. 스테로이드는 당뇨환자인 나에게 있어서는 앙숙이지만 필요악이기도 한 약이다. 다행이도 상극끼리 뒤섞여 별 탈 없이 여러 해를 넘겼다. 내성이 주는 어울림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잘 견딘 게 아니라 저희들끼리 적응이 되어선지 모른다. 수년을 거쳐 이겨내고 있는 나를 닮았다. 약물의 내성(耐性)처럼 나에게도 내성이 생긴 것은 고무적이다. 누구나 나이 들면 병 하나쯤은 달고 살기 마련이랬다. 나도 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세월이 약이다. 맞는 말이다.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흐름 속에 좋은 기억 나쁜 기억들이 묻히어 흘러간다. 거듭나기를 원하면서 꼬박꼬박 약을 챙기는 순한 환자가 되기로 한다. 두려움도 없다. 파랗고 하얀 색깔의 알약이 달콤한 사탕이 된다. 그래 나는 사탕을 먹는 거야. 의사가 흉물스런 손과 무릎을 만져본다. 모든 관절이 고분고분하다. 처방전을 받아들고 돌계단을 내려서며 자랑할 것도 없는 처지에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본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햇살을 내리쏟는다. 구름 무리가 사라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다.멀쩡해진 몸으로 병원 옆 파랑새 약국 문을 밀고 들어선다.
● 약력 ● *거제 출생, 수필가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