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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서용태] '장마'수필가/거제시주민생활지원국장
서정자  |  jj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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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0.05  07: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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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서 용 태
   
 
며칠을 두고 비가 내리더니 주말까지 이어진다. 속절없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말았다.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화단의 여섯 살 박이 목련은 아파트 이층 높이까지 자랐다. 금년에 새순이 오른 목련가지는 센 빗줄기를 견디기 힘 드는지 고개를 꺾고 축 늘어졌다. 땅속에서 살아야 할 지렁이 한 마리가 길섶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청개구리란 놈은 무엇이 그리도 보고 싶은 게 많은지 아파트 베란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거실을 기웃거린다. 베란다의 화초들도 햇볕이 그리운지 힘이 없어 보인다. 민달팽이란 놈이 화분 사이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이놈들도 무료하기는 매한가지인가 보다.

장마 통에는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이 없다. 모든 일상이 무디어지니 말이다. 아마도 우리 민족이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된 것도 사계가 뚜렷한 기후 탓인 듯하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빨리, 걸음 걷는 일도 빨리, 농사일도 빨리’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성정이 급하셔서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적기에 보리수확을 하지 않으면 곧이어 닥칠 장마에 모두 썩히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이유만이 아니다. 보리를 심었던 논밭을 제때 갈아엎어야 고구마를 심고, 잡곡 씨앗도 뿌릴 수 있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쌀농사는 어떠한가. 하지 안에 모내기를 마치지 못하면 하루에 일 할씩 감수(減收)가 된다고 하니 얼마나 조급한 상황이었겠는가. 그러니 자연스레 ‘빨리 빨리’가 체질화되었지 싶다.

하지 안에 모내기를 모두 끝내자마자 바로 우기에 접어든다. 이 기간이 장마다. 짧게는 이십여 일 길게는 한 달 이상 가기도 한다. 이 기간에는 정서적으로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긴장이 풀어진 상태다. 낮잠도 자고 무언가 주전부리라도 하고 싶은 날이 많았다. 어머니께선 밀 부침이며 빼데기(거제도 방언으로 고구마 썰어 말린 것)를 유월 돔부와 함께 푹 삶아서 간식으로 내주셨다.

어느 일요일 낮엔 숙제를 하다 깜빡 잠이 들어 형들의 놀림감이 된 적도 있다. 전기도 없고 시계도 없던 시절인지라 잠에서 깨어나면 저녁인지 다음날 아침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에서 헤어나지 못해 멍해진 나에게 형들이 다그치기 시작한다. 학교 갈 시간이 많이 늦었다며 재촉을 해대는 것이다. 허겁지겁 책 보따리를 챙겨 밖을 나서면 뒤에서 들려오는 형들의 웃음소리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멋쩍게 되돌아오던 추억이 서린 장마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남긴 <혼자 앉아서>라는 시조가 절로 읊조려진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먼 곳에 살고 있는 고향친구들이 보고 싶어진다. 별로 할 이야기도 없으면서 전화기를 든다.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다. 여성들은 몇 시간 수다를 떨어도 할 말이 남아 ‘나 지금 바쁘니 오늘 못한 이야기 내일 만나서 하자’며 마지못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는데, 정말 부러운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런 감성의 소유자라야 소설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친구도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그 짧은 안부전화 끝에 무슨 일로 전화했냐며 되묻지를 않으니 말이다. 꼭 용건이 있어서 전화를 하는 사이라면 진정한 친구라 볼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마는 모든 일상을 무료하게, 행동은 느릿하게 만든다. 모내기 이전까지 ‘빨리 빨리’에 익숙한 유전인자를 느긋한 상태로 변형시키는 반대 인자인 것이다.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먼지 쌓인 고전을 찾게도 하고, 흑백사진이 가득 들어있는 앨범을 들춰보며 웃게도 하고, 눈물짓게도 한다. 그동안 주말이면 몇 군데를 다녀오던 결혼식장에도 갈 일이 없어진다. 낚시며 등산이며 산책이며 야외에서의 레저활동을 멈추게 하니 장마의 위력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젊은 시절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을 생각하면 숨길이 가빠진다.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그렇게 살라하면 자신이 없다. 인생살이 말년 초입에 이르렀으니 여유를 찾고 세상을 관조해 보는 일도 참살이가 아니겠는가. 장마 통에 느릿느릿한 생물들이 눈에 자주 띄는 것도 모두 그런 의미를 주고 있다. 장마기에는 시간의 흐름도 더디고 하루가 길게만 느껴진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그동안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여유롭게 살라는 하늘의 뜻일 게다.

■ 약력 ■
*수필가, 거제시 주민생활국장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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