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이별

                                                                                                          박 순 선

삶은 분명 축복이다. 이는 나이 듦에 있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겠으나 나의 경우는 더한 절절함이 있다. 그 사건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살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면의 저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맑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는데 본능적 몸부림을 넘어선 무언가를 분명히 감지했다면 지나칠까. 그러나 황량한 사막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들을 법한 무언의 전언 같은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름이면 바다는 동네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멀리 헤엄치기, 파도타기는 단연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날은 편을 나누어 이어서 헤엄치기를 하기로 했다. 목표물을 정해두고 한사람씩 반환점을 돌아들어오면 다음 주자가 나가는 것이었다. 헤엄치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세 번째 주자가 되었다. 내 뒤로 두 명의 주자가 더 있었는데 그들은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환호에 힘을 얻어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물장구치는 소리만 요란하고 몸은 제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때 잔잔하던 물결이 크게 한 번 일었다. 몸은 물결을 따라 위로 솟아올랐다가 부서지는 파도에 휩싸였다. 하얀 포말 속에서도 얼른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보다 몇 배나 큰 파도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짠물이 코와 입으로 숨 쉴 틈도 없이 들고 났다. 윙윙 울리던 귀는 먹먹하면서 점차 고요해졌다.   

등줄기가 따뜻했다. 모래 뜸을 했을 때의 따뜻함이었다. 누군가 연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실눈을 떴다. 낯선 얼굴들 사이로 함께 수영을 한 동무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놀란 표정 사이로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흐르던 솜털 구름이 하얗게 흩어졌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다. 좀처럼 물러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도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풀 꺾였다. 그날은 마침 아들 녀석의 학교에서 부모 간담회가 있는 날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간담회였다.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주말이 실감났다. 소요시간을 가늠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오디오 소리도 조금 높였다. 차선을 요리조리 바꾸어 가며 달리는 차들의 대열에서 주행선에 합류했다. 편도 사차선 도로에서 주행선에 합류하는 일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자주 있는 일이건만 큰 화물차가 지날 때는 핸들을 잡은 팔에 저절로 힘이 갔다. 차체의 흔들림으로 중심을 잃을 뻔했던 적이 두어 번 있었던 터라 늘 안전속도를 떠올렸다. 그때 내 앞을 끼어드는 차가 있었다. 나는 차선을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벗어난 차는 원을 그리듯 돌면서 중앙분리대에 부딪쳤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아줌마, 우찌 살았어요?”

교통경찰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내 차 뒤로 여러 대가 엉켜 순식간에 도로는 마비가 되었다. 구급차에 오르자 요란하게 불어대던 호각소리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곳은 자주 사망사고가 나는 곳이었다. 비슷한 사고를 여러 번 목격했으나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교통경찰의 우찌 살았냐는 말은 반가운 마음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외려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사는 동안 더러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 되기도 하고, 실제로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며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잠시 경험한다. 출구가 없는 벽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온통 암흑인 세상을, 혹은 흙먼지 뽀얗게 이는 황량한 들판을 정처 없이 떠도는 아득함 같은 느낌을 말이다. 짐작컨대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쯤으로 여겨졌다. 그때 돌아온 내 의식 속의 세상은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의욕에 넘쳐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던히 애썼고 그래서 빚어진 다툼도 많았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가 없었으니 상처 또한 많았다. 어느 날 홀연히 이승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내가 있는 자리가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니 보이는 것들에 급급해 하며 살아온 나를 어찌 가엽다 아니할 수 있으랴. 오늘처럼 한밤중에 깨었을 때는 이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내 의식을 두드린다.

▓ 약력 ▓
*수필가, 문학박사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거제대학교, 창원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