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곽 호 자
낯선 사람이 가게 앞에 서더니 나를 지목합니다. 그날 같이 지내던 또래들과 헤어져 여기로 왔습니다. 새집 증후군이 채 가시지 않아서 눈이 따가운 곳이지만 주인을 생각해서라도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 집으로 오게 된 것은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고만고만한 무리들이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말이 내 또래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나는 조화이고 저네들은 생화입니다. 윤기 흐르는 얼굴, 군더더기 없는 몸매가 나를 비참하게 합니다. 가까이에서 생명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줄기마다 수액을 올리고 잎사귀는 반들거립니다. 사지 뻣뻣한 나는 자꾸 오그라듭니다. 이런 환경에 적응이 될지 아니면 도태될지 염려스럽습니다.
주인은 가장 돋보이는 곳에 나를 앉혀 주었습니다. 아마 내 모양에 흡족했나 봅니다. 귀동냥으로 듣기에는 주인은 ‘인물은 볼품없어도 맘씨는 그만’이라더니 그 말이 맞은 것 같습니다. 더부살이 처지에 가릴 것도 없지만 사람 잘 만난 것은 천운인가 싶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인지 편안했습니다. 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과장된 표현이 섞여 있지만 지나친 애정 표현은 그리 싫지 않습니다.
조석으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환멸을 느낄 만도 한데 감사하게도 애착을 가지는 듯합니다. 나에 대한 배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생화에 버금가는 우대는 난생 처음이니까요. 춤이라도 추고 싶어 흐느적거려 봅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몸이 굳어 있습니다. 세사(細絲)에 연분홍 꽃물들인 ‘조화’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나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결점입니다. 그러나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위로해 줍니다. 누구나 하나쯤의 결점은 있다고, 그것이 흠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산 지가 오래 된 어느 날입니다. 신문을 읽는 주인의 얼굴이 이상합니다. 경기침체니, 가축매몰이니 굵직한 타이틀이 일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라앉고 파묻히는 정보가 지긋지긋한 모양입니다. 주인 얼굴에 살짝 페이소스가 묻어납니다. 나하고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공연히 우울해집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뇌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예삿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파안대소하는 내면에 서러움이며 미움 따위가 묻어났기에 말입니다. 나로서는 위기입니다. 싫다고 한들 도리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묻어나면서 집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결국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이 집의 중심부인 거실에서 퇴출되어 작은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들고나는 가족들도 이젠 입도 벙긋 않습니다. 사랑의 그래프가 곤두박질합니다. 좌불안석, 열 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사람 속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완전한 꽃이 되어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가족이 되고 싶었습니다. 단지, 조변석개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이 애통할 뿐입니다.
낡았다는 것, 싫증이 난다는 것을 낸들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좋으면 품고, 싫어지면 내치는 것이 상정이라니요. 삶의 방식 중에 일부분이라며 일축해버리는 것일까요. 꽃이 아름다운 건 사람을 닮지 않아서입니다. 복잡 미묘하지도 않을뿐더러 내면과 외면에 앙금 남길 줄도 모르니 그렇습니다. 마음에 그늘이 없으니 밝기 마련입니다.
따스한 봄날입니다. 주인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대청소를 시작합니다. 잡동사니들을 추려 담습니다. 나는 드디어 집밖으로 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몸이 굳어지고 침이 마릅니다. 조화의 수명이 길고 짧음은 사람의 손에 달렸습니다. 더 버티고 싶은 간절함이 쓰레기봉투를 거부합니다. 그때였습니다. 주인은 나를 번쩍 들어 창밖으로 내밀었습니다.
내동댕이쳐질 운명에 더럭 겁이 나서 눈을 감았습니다. 순간 주인은 내 몸에 붙은 먼지를 부드럽게 털어냈습니다. 그리고선 좌대에 도로 앉혀줍니다. 무슨 조화(造化)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나무 등걸에 걸려 위기를 모면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나를 다시 거두어들인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주인의 마음이 바뀐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생화의 유연함이 부러운 건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여지없이 지고 맙니다. 풍우에 시달리고 질병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일생이 화려한 만큼 고단함이 따릅니다. 이 가여운 꽃을 대신해 조화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자긍심은 뜻밖입니다.
주인이 내 옆에 섰습니다. 산 그림자처럼 짙은 실루엣이 흔들립니다. 말 못할 진통이 올 때마다 탄식을 삼키는 모양입니다. 연분홍 꽃잎으로 가려주고 싶지만 미동이 없습니다. 서걱거리는 옷깃을 부여잡고 나의 얇은 꽃잎을 쓰다듬습니다. 바로 그때, 겉으로 보이지 않던 주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묵정밭처럼 황폐해진 내면이 엿보입니다. 건초 덤불 사이로 바람이 건들거리고 외로움은 연신 거미줄을 엮어댑니다. 안쓰럽습니다.
사람의 겉과 속마음. 알지 못합니다. 투시경에도 찍혀지지도 않습니다. 이제 강한 척하며 살아가는 주인을 도울 생각입니다. 거미줄이 얽혀 있는 주인의 마음 밭에 팔을 걷어 부치고 빗자루를 들기로 하겠습니다.
▒ 약력 ▒
*수필가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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