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무기의 손잡이를 힘껏 쥔다. 압축되었던 물이 시원하게 공중으로 퍼진다. 미세한 방울들이 풍란의 잎과 뿌리로 떨어진다. 허공을 헤매던 풍란의 뿌리가 연둣빛으로 물든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이 불쑥 자기도 물 좀 달라고 한다. 며칠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힘이 잔뜩 배어 있다.
나는 냉장고에 있다고 짧게 말하고 다시 분무기를 손에 쥔다. 꼼꼼하게 물을 뿌리고 난 잎에 앉아있는 먼지들을 닦아낸다. 이렇게 화초에도 물을 주고 잎을 닦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져 속상한 마음도 가라앉는다. 화초들이 잎을 반짝이며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서늘한 등이 보인다. 남편은 아프리카의 숲과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의 마음은 갑갑한 이곳을 벗어나 아프리카에 가 있는 듯하다. 십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서로 다툼이 있어도 조용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초연해진 것인지, 무심해진 것인지. 결혼 초에는 미안하다며 곧잘 사과하던 남편이 이제는 말이 없다. 물론 그런 사과의 말에 행동이 바뀌어야지 말만하면 무슨 소용이냐며 따지고 들었던 나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분명한 것이 좋다. 남편과 다툼이 일어날 때도 왜 갈등이 생겼는지 원인을 따져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를 바라며 나에게 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피하려고 하냐며 응수했다. 남편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생각조차 안한다. 이제는 나의 빤한 전술에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저 텔레비전 리모콘과 맥주와 땅콩이면 이럭저럭 한세상 행복하다는 모습이다. 전의를 상실한 나는 김빠진 맥주 꼴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텔레비전에서는 아프리카 부족의 평화로운 삶이 펼쳐지고 있다. 나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슬그머니 아이들 옆으로 앉는다.
‘조예족’ 최고의 사냥꾼은 모처럼 큰 동물을 사냥해왔다. 한동안 사냥을 하지 못해 모두들 며칠째 굶고 있었다. 부족 모두가 골고루 먹어야 하고 사냥에 공이 큰 사람은 더 줘야 하기에 삶아 놓은 고기를 놓고 두 시간이 넘게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빨리 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사냥꾼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은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살지만 문화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잡아먹지 않는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투지도 않는다. 남자가 두 명 이상의 아내와 살 수 있듯이 여자도 둘이상의 남편과 살 수 있다. 서로에게 공평하게 배려하며 살고 있다.
음식의 배분이 끝났다. 모두들 자기 몫의 고기를 먹고 있다. 그런데 심사숙고해서 나눈 고기를 먹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물침대에 모로 누워 있다. 화나서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이 정리될지 궁금했다. 애완동물을 기르며 전쟁도 다툼도 없는 평화로운 부족이라도 굶주린 상황에서 음식 때문에 화가 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사람들이 달려가 화난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는 것이다. 화가 났던 사람들이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뒹굴며 한참을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도 그렇게 그들은 다시 행복한 부족이 되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이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과 나도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별일도 아닌데 며칠 동안이나 서로 말을 않고 신경전만 벌이고 있었다니 갑자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아빠와 엄마의 다른 성격 탓에 눈치만 보다가 속이 시원했나 보다. ‘조예족’은 간지럼을 태우며 다툼이 될 수 있는 일을 유쾌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간지럼은 참 신기하다. 내가 나를 아무리 간지럼 태워도 간지럽지 않다.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는 기저귀를 갈아도, 겨드랑이를 닦아도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물론 아이가 간지럼을 탄다면 엄마는 아기를 돌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간지럼을 타기 시작한다.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때부터다. 이렇게 ‘너’와 ‘나’를 구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간지럼을 느낀다. 만약 낯선 사람이나 싫은 사람의 손길이라면 순간적으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다. 타인에게 간지럼을 허락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지하고 허용하며 ‘우리’가 되어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타고난 자신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없을 때 불화와 다툼이 생긴다. ‘나’를 바꿀 수 없다면 ‘너’에 대해서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남편의 팔짱을 끼며 묻는다. 아직도 목마르냐고. 남편은 계속 웃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거라 생각하며 나도 웃는다. 집안에 봄바람이 분다.
● 약력 ●
전북 임실 출생, 수필가
전북대학교 통계학과 졸업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