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윤 미 영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게발선인장과 함께입니다. 봄볕의 따사로움을 흠뻑 느낍니다. 먼 산을 향한 눈은 천천히 무언가를 찾습니다. 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오갑니다. 기다렸다 하여 냉큼 찾아주지 않는 봄의 속을 알기에 집밖에 나오지 않고 베란다에서 맞습니다. 큼직한 유리벽으로 눈속임을 하면서 말입니다.
선인장은 이번 겨울을 잘 견뎠습니다. 여름에는 힘들었습니다. 사람의 무심함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몸집에 비해 턱없이 작은 집을 주어서 그랬습니다. 촉수도 적당해서 의심하지 않았고,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몸체만 보고 잘 자라는 줄 알았습니다. 혹여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낌새를 발견하면 귀찮아질세라 ‘아무 일 없다’를 주문으로 외우며 얕은 일상을 보냈습니다.
검은 빛을 띤 녹색의 몸체가 그럭저럭 달려 있기에 그런 줄 알다가 뿌리 가까운 부분에서부터 누렇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 무언가 잘못됨을 알아차렸습니다. 화분에서 선인장을 꺼내어 뿌리를 보고 놀랐습니다. 뒤엉킨 것은 물론이고 절어 온통 뿌리뿐이었습니다. 공간이 좁아서 숨쉬기에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안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때만 되면 물을 흠뻑 주었으니 탈이 난 것입니다. 그래도 제 나름 녹색을 띠며 보여준 성의가 놀랍습니다. 분갈이를 해서 앞 베란다에 다시 두었습니다. 빨래를 널거나 걷어 들일 때, 이불을 털 때, 집 공기를 바꾼다며 창문을 열 때마다 눈길을 주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녀석과 같이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투명 유리로 된 바람막이 앞에서 하염없이 봄볕을 맞습니다. 나긋나긋 쓰다듬던 볕이 시간이 지나니 작은 가시처럼 꽂힙니다. 찌릿하게 번지는 통증은 작은 움직임에 타다닥거리는 정전기와 함께 멍한 정신을 일깨웁니다. 얼마 전에 떠나보낸 그녀가 생각납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옆에 있는 녀석의 존재 때문입니다. 그녀도 이 녀석처럼 그랬습니다. 괜찮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겨드랑이 사이와 팔 위쪽이 붓고 손도 많이 부어서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 병원에 갔다 왔다는 말을 달았습니다.
선인장이 나에게 보였던 성의를 의심 없이 믿었던 것처럼 그녀의 말이나 행동을 믿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닥칠 현실이 두려워서 모른 척했는지 모릅니다. 형제가 없는 그녀가 아프면 어찌 되는지, 그 빤한 상황을 알기에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착한 그녀는 깔끔하고 단정한 성격처럼 다른 모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나면 보자는 나의 핑계도 말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겨울 제일 추운 날, 아이 둘을 남기고 한복 한 번을 입고 영원히 떠났습니다. 재가 되어 좋아하는 산으로 갔습니다. 그녀의 유방암이 재발한 것입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고 온 날은 하루가 까맸습니다. 그녀가 통증을 견디며 보냈던 밤은 이보다 더 했겠지요. 그녀의 말만 믿고 전화로 짧은 안부를 챙기고, 그녀가 약속시간을 미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아프다’, ‘만나자’와 같은 말들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요. 남겨질 자식에 대한 애달픔은 더 했을 겁니다. 그녀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일이 가시가 되어 나의 살을 찌릅니다.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에 핑계 댈 수 있는 변명이 있음에 안도하고, 어떤 일에는 내면의 밑바닥에서 오는 본능적인 신호를 무시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녀와의 짧은 인연에서 후회되는 일이 무력감으로 남아 한동안 힘이 들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할 걸 하는 마음이 불면의 밤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나 마음을 뜻합니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다해 살지 않았던 나의 가벼운 생활은 이 말 앞에 고개가 많이 숙여짐은 왜일까요.
그녀가 그렇게 가리라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해야 하겠지요. 원하지 않은 일도 생기고 짐작했던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제는 예전과 조금 달라지리라 다짐해 봅니다. 조금 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했음이 후회로 남은 지금 또다시 같은 아픔을 맞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귀도 활짝 열어 두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나의 모든 감각을 깨어 있게 해야겠지요.
봄볕 품에서 오래 오래 곱씹어 봅니다. 선인장에게 묻습니다. 그 때, 힘들었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았느냐고. 선인장은 대답 대신 아기 손톱만한 빨간 꽃봉오리를 보여 줍니다. 그녀가 내게 보내는 위로일까요.
☐ 약력 ☐
*거제 출생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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