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윤 정 희
임진년 새해가 밝아왔다. 사람들은 지난해나 올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을지라도 해가 바뀌면 새 희망에 가슴이 부푼다. 나에게는 지난 몇 해 동안이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었다. 해가 바뀌어도 내속의 어두운 그림자는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일월 초 어느 아침 조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아침시간, 난데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교수님의 말씀, 내가 《수필과 비평》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전갈이다. 그 말씀에 갑자기 가슴속에 뭉쳐 있던 무언가가 확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순간 “올해는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 같아,” 감사의 인사는 드렸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수화기를 놓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무르고 서 있었다. 기쁜 마음이 지나가니 이제는 부끄러움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은 나의 글이 많이 모자라고 부족한 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사양하기 싫었던 것이 솔직한 그때 나의 심정이었다. 어둠에서의 일탈은 새로운 빛이고 희망을 주는 자양분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신년 초에 반갑고 기쁜 선물을 받았다. 어젠가는 그들이 아니라도 다른 누구에게 도움을 줄 일이 있으면 꼭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쨌든 내 인생 끝자락, 마음 밭에 수필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어 마음 흐뭇하다. 또한 글 한 줄을 잡고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음이 무한히 고맙다.
어린 시절 나는 많은 자매들 속에서 자랐다. 농촌이라 소를 몇 마리 키웠다. 잔일도 도와주고 소를 먹여주던 남의 집 애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애가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소 먹이는 일을 내가 맡았다. 처음에는 소도 겁나고 동내 머슴애들과 같이 다니기 싫다고 부모님께 울고불고 억지를 썼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성질이 다른 두 마리의 소를 모느라 넘어져 무릎을 깨기도 하고 가시에 종아리를 긁혀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다가와 등을 토닥여 주셨다.
소 먹이는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짐승도 사람처럼 성질이 각각 다르고 말은 못 해도 자기를 정성껏 돌봐 주는 사람의 마음을 가늠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 소는 아직 어렸지만 동네 소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해가 넘어가고 산그늘이 지면 아무리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도 소를 몰러 숲으로 올라간다. 기척을 알아차린 우리 소가 먼저 내려오면 다른 소들도 따라 내려왔다. 참말로 눈치 빠르고 기특한 소였다.
차차로 소먹이는 일이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소를 매어 놓은 산으로 곧장 올라갔다. 말뚝에서 소를 풀어 장배(고삐)를 뿔에 칭칭 감아 풀밭으로 보내고 나면 나에겐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볼 만한 책이 생기면 들고 와 널따란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맘껏 사색을 즐겼다. 시원한 바람소리와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 산 개울을 타고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는 사춘기 소녀를 시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 시절 어렴풋이 보이는 문학에 대한 갈망으로 몸살을 앓았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오늘의 이 길이 싹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영향을 받았음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늘 산이 좋았다. 넓은 아스발트 길보다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것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여행을 가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명보다 자연 경치를 더 좋아한다. 좀 젊은 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다른 어떤 장애보다도 내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아픔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겁이 났다. 남의 책을 읽기는 쉬워도 내가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늦은 나이 요만큼 살았으니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하면서 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은 나를 참으로 우둔하게 만들었다. 한 줄의 문장을 잡고 몇 번을 고쳐 놓아 본다. 문장이 변변찮아 내 스스로 한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탓한다. 그럴 적마다 내 또래의 하릴없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서툴고 모자라도 올해 나에게 힘을 주었던 그 순간을 잊지 말자고 나를 다독거린다.
이제는 저만치 문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도 높든 낮든 자신들이 원하는 문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약력
*거제 출생, 수필가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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