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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이시우 흉상 제작 전 '친일 여부 검증 필요하다'일제기관지 '매일신보' 근무 친일 행적 여부 규명돼야
박춘광  |  geoje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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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06  17: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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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추경예산으로 흉상제작비 5천만 원 편성
거제스포츠파크에 흉상 건립-신중한 접근 필요해
거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후세가 기리기에는 시민적 공감대 미약해
제2의 김백일동상 행태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 

   
 
국민가요로 불리우는 '눈물젖은 두만강'의 작곡자로 알려진 이시우씨가 거제시 거제면 출신이라 그의 노래비와 함께 흉상을 거제스포츠파크에 건립하는 문제가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거제시는 포로수용소유적공원내에 김백일 동상을 세웠다가 그가 일제시대 친일 행적인 간도토벌대 장교였던 사실로 철거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들과 법적다툼까지 벌이는 홍역을 치루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충분한 조사나 검증과정이 미흡한 상태인채 이번에는 <작곡가 이시우씨 흉상 제작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은 거제시가 제1회 추경예산에서 5천만원의 예산을 책정해 거제면과 거제면번영회 등이 사업을 추진토록 사업비가 배정되어 있다.  

온몸으로 독립을 외쳤던 3.1운동이 전개된 지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여전히 친일인사 문제는 사회적 숙제로 남아 있다. 친일파 척결에 앞장서며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김백일 동상과 관련해 일부 거제시민들과 함께 건립의 부당성을 제기해 심한 홍역을 앓고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 의 작곡자 이시우씨 고향은 거제면이다. 이 노래를 불러 국민가수로 떠오르면서 1980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받으며 영광을 누렸던 가수 김정구씨와는 달리 작곡자 이시우는 고향에서 조차 흔한 작곡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가 거제면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노래비가 가까스로 세워진바 있다.
   
 눈물젖은 두만강 레코드판 표지
   
 이시우 노래비

















일부 시민들릐 시각에서는 그 정도면 족하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흉상까지 세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시는 거제를 빛낸 인물의 발굴과 조명사업으로 시인 유치환 선생의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 양달석 화백 그림비, 성파 하동주 선생의 묵적비, 향파 김기홍 선생의 애란비와 홍준호 시인의 시비 등을 세워 향토 예술인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차원임을 밝히고 있다.

노래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소원한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가 이시우 씨의 작곡 배경과 학력 경력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일부 밝혀지기는 했으나 그가 만주 하얼빈에서  1940년대 당시 우리 민족을 압박하기 위해 유일하게 한국어판으로 발행되던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에 근무한 경력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매일신보에서 어떤 역활과 활동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 그의 친일행적을 소상히 알기는 힘든다. 

그가 194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일제의 기관지 하얼빈지국에서 공부나 생업을 위한 수단으로 근무를 했는지, 아니면 일제로 부터 발탁된 신문기자로서 활동했는지와 일인소유의 조선상공신문의 사상적 기조 등을 미루어 보아 당시 행적에 대한 조사와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당시 행적이나 친일행위 여부에 대한 조사와 시민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충분한 검증 후 시민적 합의가 이루어 진 후에 흉상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사업추진과 관련해 옥영실 거제면번영회장은 "가수 김정구씨가 생전에 만주에서 함께 활동했다고 했다. 유랑극단원들과 같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려니 매일신보 근무조건이 필요했던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분이 해방직전인 1940년대 부터 해방때 까지 매일신보(당시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돼 유일한 일간지)와 조선상공신문에 근무한 부분에는 구체적으로 잘 알지못한다. 그러나 그는 사상가라기 보다는 예술인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시우 출생 그리고 학력과 경력
이시우(李時雨)씨는 호적등본상 그의 본명은 이만두(李萬斗)다. 그는 1913년(대정2년) 11월 4일 거제면 남동리 45번지(현 삼성전자 거제대리점옆)에서 부친 이경수씨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8년 거제초등학교(19회)를 졸업(학적부에는 창가에 소질이 있다고 적혔다)한 그는 한문 수학을 마치고 가족을 따라 경남 창원군 국산리로 이사했다.

그 후 만주하얼빈상업학교(1932. 4.1~1936. 3.10 )와 만주국립대학(1936. 4.1~1941. 3.10)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 전신인 일본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전문부(1941. 4.1~1941. 12.31) 법률전공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공부를 했다던 시절인 1940년대에 매일신보사 하얼빈지국 근무,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1941~1945)에 근무하다가 1945년 해방으로 귀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194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공부했던 시기와 매일신보사, 조선상공신문사 근무 기간이 중요 검증사항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알려지지않고 있으나 매일신보가 일제가 발행한 기관지임은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는 귀국 후 대한민국 내무부장관촉탁(1948년), 대한반공 인천시연맹 특무국장(1949), 부산시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전부차장(1950), 경상남도 비상사태태책위원회 선무과장(1950), 치안국 지전사 주임 근무를 시작으로 경기도 부평 형사주임(1954)으로 재직하다 면직, 이후 1958년 특채로 경상남도 동부산 경사근무를 거쳐 전남함평 주임을 끝으로 퇴직했다.

면직이후 특채되기 전 기간에는 대한건설공사대표와 국제산업여신주식회사 조사국장, 국제레코드제작사 부사장(1957)을 지내기도 했다. (거제초등학교졸업이후의 학력은 밝혀지지 않아 명치대학 작곡가를 졸업했다고 알려져 왔다. 위의 학력과 경력내용은 1951년 치안국 지전사로 발령을 받을시 제출한 이력서를 둘째아들 이홍장의 장남 이봉희씨가 2009년 4월 9일 전남경찰청에서 발급받은 경력증명서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짐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 동기와 배경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고(故) 김정구씨의 구수한 목소리로 만인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 노래는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한이 배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북한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2005.5)는 이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북한은 이 노래를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
 
국민가요로 일컬어지는 이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은 1930년대 중엽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 중이던 극단 `예원좌'의 작곡가 이시우씨가 지린(吉林)성 도문(圖們)시의 한 여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1935년 어느 날 여관 뒷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 두 그루를 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관집 주인이 그 나무는 자신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 고향에서 떠가지고 와 1919년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씨가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을 구상하며 잠을 못 이루던 그날 밤 옆방에서 비통하고 처절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그 여인의 남편과 여관집 주인은 친구 사이인데 독립군 활동을 하던 남편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으며 그날이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두만강 가에 나간 이씨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고 그 곳에서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사연을 이야기 해주자 그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이씨가 곡을 붙였다고 잡지는 밝혔다.

이렇게 창작된 노래는 극단 예원좌의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를 시켜 공연 막간에 부르도록 했고 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씨는 김용호 시인에게 부탁해 노래가사를 다듬고 선율을 완성해 고(故) 김정구씨의 노래로 OK레코드사를 통해 취입하게 됐다. 레코드에는 작사자가 김용호로 올라 있다. 따라서 잡지는 이 노래가 한명천 원작, 김용호 개작, 이시우 작곡이 정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명천은 1940년대 후반 북한정권 초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그의 대표작 '북간도' 는 북한에서 아직도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문학사에서 '2대 서사시' 로 평가받고 있다.

   
 
이시우 작곡활동과 회상
이시우씨는 퇴직이후에도 작곡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주요 작곡 작품으로는 눈물 젖은 두만강 외에 섬 아가씨, 눈물의 국경, 타향술집, 봄 잃은 낙동강, 님 없는 거제도, 인생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진도 아가씨 등을 발표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 국민가요로 떠올리게 된 동기는 1964년에 방송된 KBS 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 5분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흘러나오면서 본격적인 국민가요로 불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작곡가 이시우 선생의 이름이 되살아났다.

어린 3삼매를 돌보며 달동네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작곡활동을 계속하던 이시우씨는 1975년 1월(음력 1974년 12월 12일) 추운 겨울 하얀 첫눈이 내리는 날 집으로 귀가 하던 중 교통사고로 한양대학교 영안실에서 쓸쓸히 세상을 마감하고 인천의 용화사에 안치돼 있다.

이시우씨 둘째 자부는 “남편이 철없이 아버지 작곡사무실(당시 을지로 5가에 위치)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당시 3남매를 데리고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닐 처지인데도 돈이 없을 때에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둘째아들에게 생활비를 주는 감성이 여리고 자녀들에 대한 책임이 강한 자상한 시아버지 였다”며 당시를 회고 했다.

작곡비 건립 및 기념동산 조성 추진
거제면 번영회(회장 옥영실)는 노래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소원하며 민족정서를 살려내고 조국강산을 애찬하는 우리민족의 고유정서가 강하게 담겨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가 거제출신 이시우씨에 대해 최근에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을 바탕으로 25주기를 맞아 노래비건립 및 기념동산을 조성함은 물론 추진위원회를 구성 기념사업을 하는 과정이다.  

매일신보란 어떤 신문인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유일한 한국어 일간신문이었다. 발행년도 1910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창하며 우리민족의 말살을 획책했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매일신보》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李仁稙)·조중환(趙重桓)·이해조(李海朝)·이상협(李相協)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이광수(李光洙)가 처녀작 《무정(無情)》 《개척자(開拓者)》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후로는, 민족지와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편집국을 《경성일보》 편집국에서 분리시켰고,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으며,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 독립된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와 함께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자매지로 《월간매신(月刊每申)》(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每日新報寫眞特報)》(1938.11) 《국민신보(國民新報)》(1939.4) 등을 발간하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로 광복될 때까지 다시 유일한 우리말 일간지가 되어 일제의 침략전쟁과 민족말살정책을 대변하던 기간에 이시우씨가 이 신문에 근무한 셈이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날부터 광복되던 날까지 중단된 일 없이 발간된 단 하나의 한국어신문이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에 있었고, 8·15광복 뒤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조선상공신문사는?
좌익계 신문의 하나로, 1945년 11월 1일 김형수(金亨洙) 등이 일본인 소유의 『조선상공신문(朝鮮商工新聞)』의 사옥과 시설을 구입하여 <중앙신문>으로 창간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형수, 편집국장은 이상호(李相昊)이었다.  해방 후 서울에는 일본어로 된 ‘경성일보(京城日報)’와 ‘조선상공신문(朝鮮商工新聞)’. 한국어로 된 ‘매일신보(每日新報)’, 13개 도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일본어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는 정도의 자료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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