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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안중근 의사는 두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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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27  10: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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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직후 우덕순(禹德淳·1880~1950, 일명 連俊)
   
사)국학원 원장(대), 전국민족단체 연합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
 
박근혜 대통령이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네덜란드 공식 첫 일정으로 만난 사람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었다. 그는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자랑을 했다 한다. 시진핑 주석은 박 대통령의 또 따른 요청인 시안(西安)시 광복군 주둔지 기념 표지 석 설치도 적극적으로 건설했고, 곧 준공될 것도 약속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주독립의지는 당사자건 제 삼자건 간에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에 세계적으로 새롭게 공감을 얻어 가고 있다. 인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보편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이기 때문이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었다.

동양 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안중근 의사에게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또 다른 동지가 마지막 까지 옆에 있었다. 우덕순(禹德淳·1880~1950, 일명 連俊)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堤川)시 출신이다. 그는 9살 때 부친상을 당해, 윤 씨 슬하에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24세에는 상경하여 동대문 근처에서 잡화상을 하다가 만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연초 행상을 한다. 그곳의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 2회 발행하는 항일 운동지인 『대동공보(大東公報』의 집금 회계원으로도 일하였다.

1908년, 우덕순은 삼 백 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회령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탈출한다. 이듬해 봄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한다.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한다. 우덕순은 “그(안중근)와 나는 동갑인데 내가 2월생이고, 안은 5월생이다' 라고 회고한다.

거사 직전, 두 사람에게 거사자금과 권총을 건네 준 사람은 유진율과 이강이라는 동지였다. 이때 유. 이 두 사람이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떨구었다. 고 우덕순은 회고록에서 말한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첫 번째,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두 번째,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세 번째, 될 수 있는 대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한다.

채가구(蔡家溝) 역은 하얼빈 역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는 채가구역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게 되어 있다. 하얼빈역의 경비가 강화되자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위해 안 의사가 채가구 역을, 우덕순이 하얼빈 역을 저격 장소로 맡기로 약속한다. 하루 후, 안 의사가 자기가 하얼빈을 맡겠다고 고집해 맡은 장소가 바뀌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채가구 역에 약 2분 정차했으나 경비를 맡은 러시아 군인은 우덕순이 투숙했던 여관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궜고, 우덕순은 저격에 실패한다. 약 세 시간 후 러시아 군인 수 백 명이 우덕순이 투속했던 역 여관을 수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였소. 나머지 수상한 조선 사람을 잡으라는 지령이 내려 졌소." 그러자 우덕순은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몇 번이고 외쳤다.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한 안 의사의 시신을 처음 대한 것도 우덕순이었다. 일본 교도관은 함께 수감된 우덕순을 불러서 "오늘 아침 10시에 안중근은 하늘나라로 올라갔오. 영결식이나 하라고 불렀오."라고 말한다. 우덕순이 안 의사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교수형으로 죽었으니 얼굴 모양이 대단히 흉하다"라며 끝내 시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104년 전인 1910년 3월 26일이다. 그날은 한 해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에 의하여 처형된 날이다. 일제는 복수의 날로 바로 26일을 잡은 것이 분명하니 속 좁고 간교한 마음일 뿐이다. 그들은 진정 자기들이 스스로 패전의 파멸을 자초한 전범인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거사 전,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에 우덕순은 원수를 갚는 노래, ‘보구가(報仇歌)’를 지어 화답한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략- 이슬 맞고 비 맞아 멀고 먼 길 지날 때에, 앉아서나 서서나 하늘 우러러 기도하니 살피소서, 살피소서, -략- 오호 간악한 노적(老敵)아. 너를 이 정거장에서 만나기를 천만번 기도하며 주야를 잊고 만나고자 하였더니 마침내 너, 이토를 만났고나. 금일 네 명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략- 을사체약 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략- 우리 국권 회복하고 부국강병 꾀 하며는 세계 어느 누가 압박할까. 우리의 자유, 하등의 차가운 대우를 받으니 속히속 히 합심하고 용감한 힘을 가져 국민 의무 다하세.“ (역주 필자)

우덕순은 동지 안중근의 순국 후,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 등지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 위원장으로 아들 우대영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수송에 진력하였다. 귀국 후에는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동란 중인 1950년 9월 26일, 서울 수복 이틀을 앞두고 인민군에게 처형되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 둘도 없는 동지 안중근의 뒤를 따라 그 또한 ‘26일’에 돌아가시니 죽음에 앞에서는 누구나 공평 하다는 하늘의 뜻이런가.

그러나 수많은 유, 무명의 독립군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있다. 안중근과 우덕순과 같은 이 시대의 독립군이 2명만이 아니라, 2만 명, 2백 만 명, 2천 만 명, 2억 명이 태어나 대한민국의 위대한 홍익정신으로 인류의 자유를 반석처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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