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 사람들 > 양방수재미소식
[양방수재미동포소식]'그 때 그 사람들 이야기'양방수씨가 만난 오현주.복혜숙.여운계씨 이야기
거제타임즈  |  geojetimes@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4.20  22:30:1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2014년 4월 15일 방송의 역사를 쓰고 있는 이장춘씨가 '춘하추동방송'이라는 그의 홈페이지에 양방수씨 메일로 보내준 양방수님의 '그 때 그 사람들 이야기-오현주,복혜숙.여운계'의 글을 소개한다.

   
양방수씨
이장춘씨는 "꿈많던 시절 양방수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진과 글입니다.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 글과 사진은 양방수님이 보내오신 그대로이며 이글에 맞는 노래도 찾았다"고 적고 있다.  이 글과 노래가 사진들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20대의 꿈 많던 시절 빛바랜 사진이 이제는 양방수님도 70이 넘었으니 20대에 촬영한 사진들이 세월이 지나 다시보는 감회가 새로울 것이라며 "젊은 시절 꿈에 살다가 나이들면 추억에 산다"라는 말이 딱 맞다고 비유했다. 이 세사람은 방송과는 아주 인연이 깊은 분들이다.

최초의 영화배우이고, 최초의 방송국 출연자 복혜숙! 방송계에서는 '방송할머니'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모두에게 익숙한 분들이다.

오현주씨, 그녀는 한 시대를 풍미한 미인이다. 그가 1959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히면서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 태평로,종로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던 시절, 그를 보러 나온 사람들로 인도를 메웠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리 하지도 않지요. 영화계에서 방송계에서 늘 바쁘게 활동했다. 그 시대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운계. 1950년대 학생시절부터 TV에 출연하면서 시작된 연예인으로서의 인생은 방송이나 TV, 영화 등을 오가며 바쁘게 살다가 가셨다. 가시던 그해 KBS는 연기대상 공로상을 수여했다.  일생동안 온갖 힘을 기우린 분에게 주어진 상이었다.
   
1957년 사진/김영수,구봉서,김희갑, 복혜숙 등 그 때 그사람들이 라디오 연속극을 녹음하던 모습
   
 
   
맨 뒤 검은 옷을 입고 바라보고 있는 여운계 여사
여운계여사는 1962년에 실험극단 단원으로 지내다가 같은 해에 KBS공채 탈랜트로 데뷔했다. 이후 1964년에는 TBC공채 탈랜트에 다시 합격해 대한민국 최초의 일일연속극 '눈이 내리는데'(극본 한운사,연출 한운진)의 시골다방 마담역으로 안방 극장에 데뷔했다. 2009년 5월 22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3년 9월 15일부터 2004년 3월 23일까지 방송된 문화방송의 대하드라마 '대장금(극본 김영현 연출 이병호)'에 정말금(큰상궁)역으로 열연햇던 여운계 여사의 모습은 아직까지 대중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한국 미(美)를 세계만방에 자랑하던 미스코리아 진 오현주 여사! 1957년 5월 19일 서울특별시 중구의 서울 시립극장에서 열린 첫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로 본선에는 에선을 통과한 7명이 참가했고, 첫 대회부터 진 당선자는 미스유니버스에 참가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춥고도 추운 겨울 한편의 영화제작을 위해 김포공항에서 찍은 추억어린 사진이다. 사진 좌로부터 오현주여사, 복혜숙여사, 양방수씨
이듬해 1958년 5월 2일 서울특별시 중구 대한극장에서 열린 두번째 미스코리아선발대회가 열렸고, 세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1959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시립극장에서 열린 미스코리아선발대회였다. 
   
당시의 미스코리아진 오현주여사와 양방수씨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내신 오위영 선생님늬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오현주 여사는 1959년 이화여대 재학당시 패션디자이너 노명자(노라노)씨의 눈에 띄어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했다.  163cm에 45kg의 몸매와 빼어난 미모의 오현주여사는 3회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진(眞)으로 뽑힌 뒤 같은 해 미스유니버스선발대회에 출전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인기상과 스피치상 등 4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한국전쟁 직후 미스코리아대회에서 한국의 미를 알렸던 오현주 여사도 2010년 5월 11일 오전 2시 15분 숙환으로 자택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불리는 복혜숙9본명 복마리아) 여사는 1904년 4월 24일 동대동에서 후일 감리교목사가 되는 아버지 복기엽씨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복 여사는 수에선생이 될 생각으로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 기에학교에 들어간 후 뛰어난 솜씨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적지 않은 용돈을 벌었지만 그 돈으로 극장에 출입하면서 각종 공연과 영화에 빠지고 무용수가 되려고 사와모리 무용연구소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반년 동안 궂은 일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소식이 끊긴 딸을 찾으러 일본에 온 아버지에 의해 고국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귀국한 뒤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의 금화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곧 서울로 올라와 1920년 당시 당성사의 인기 변사인 심덕경씨의 소개로 김도산씨를 알게되고 1921년 복 여사는 복마리아라는 이름을 이혜경으로 바꾸고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4년 일본에서 유학한 현철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우자 복 여사는 이곳에 들어가서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고 내분이 쌓인채 문을 닫게 되지만 복 여사는 '인형의 집'에서 노래로 출연해 호평을 받고 이월화가 빠진 토월회의 전속 배우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 때 예명도 이혜경에서 복혜숙으로 바꿨다고 한다. 복 여사는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역으로 이뤙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지만 내부의 문제로 인해 토월회는 휴면기에 들어갔고 복혜숙은 무대를 떠나 기생으로 일하며 영화에 출연했다.

복 여사가 비중있는 역으로 처음 출연한 영화는 '논중조'(1926년) 이었고 그 뒤  '홍련비련(1927년)'' '낙화유수(1927년)', '세 동무(1928년)' 등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복 여사는 '아리랑(1926년)'의 신일선씨와 함께 20년대 최고의 스타로 변신했다.  복 여사는 1928년부터 8년간 비너스라는 다방을 운영하였는데 비너스에서는 낮에는 차를 팔고, 저녁에는 바를 운영하며 춤을 추는 무도장을 겸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무도장을 허가하지 않자 1937년 1월 '삼천리'에 복혜숙 여사를 비롯한 서울의 유명한 기생들이 '서울대스홀을 허가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너스를 운영하면서 복 여사는 1929년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고, 영화에도 계속 출연하면서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방송극을 쓰고 출연했으며, 30년대 부터는 '그대 그립다''종로 행진곡' 등 유행가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에  복 여사는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평생을 배우로 살면서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살아 온 복 여사는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마지막 영화는 '이장호 연출의 낮은대로 임하소서'(1981년) 이었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장식물을 만들며 소일했던 복 여사는 1982년 10월 5일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시대를 살았던 여배우들이 어렵고 힘들게 여생을 보냈던 것에 비하여 복혜숙 여사는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평소 후배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었던 복 여사는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TBC-TV에 출연했던 문화인들, 우로부터 오현주, 한사람 건너 조경희, 유한철, 사회자 박종제 안운서
아래는 TBC-TV 마지막날 좌담회에 나온 복혜숙여사와 여운계 씨 
   
복혜숙 여사
   
여운계 여사
   
TBC연속극 '아씨'에서 김희준 씨오 여운계 여사
   
2009년 여운계여사가 타계한 후 KBS가 연기대상 공로상을 추서했다.


 

거제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거제촌놈 2014-07-09 03:07:00

    야~ 1960년경이면 우리가 태어 나기전 이야기다.
    그때 거제 섬 사람이 서울 충무로 바닥 영화판에서
    활동했다니 상상하기 힘든일이다, 거제 사람 화이팅이다.신고 | 삭제

    최신 인기기사
    1
    거제시 26일부터 전 시민 긴급 재난지원금 지급…5만원 선불카드
    2
    코로나 위기 '맛'으로 극복…거제 장평 '조선국밥' 눈길
    3
    [기고] 대우조선해양 매각, 조선도시 거제의 몰락
    4
    거제시 오늘부터 긴급재난지원금 5만원 지급 시작
    5
    서일준 "3급 기밀 훔쳤는데 보안우수표창 준 이상한 방사청"
    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인터넷신문 | 등록번호 : 경남 아009호 | 등록연월일 : 2005년 11월 10일 | 제호 : 거제타임즈 | 편집인 : 박현준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현준
    발행인 : 김철은 | 발행연월일 : 2003년 4월 16일 | 발행소: 경남 거제시 서문로 72 (고현동) 태원회관빌딩 6층ㅣ전화: 055-634-6688 / FAX: 055-634-6699
    Copyright © 거제타임즈. All rights reserved. 문의메일 : geoje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