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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주] 종과 당목(撞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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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8  11: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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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과 당목(撞木)

                                                                                                                                     이 양 주

   
 
하도 울어서 묶어 놓았단다. 나더러 풀어주란다.
태풍이 온 천지를 휩쓸며 지나간 다음 날 가까운 사찰을 찾았다. 마침 경내에선 절집 사람들이 기다란 빗자루며 갈고리를 하나씩 들고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들을 수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고 작은 나뭇가지와 꽃들이 강풍과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꺾이고 부러져 땅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누워 있었다. 스님께서 쓰러진 꽃대들을 일으켜 세우며 안타까워하신다.
“이럴 땐 키 큰 놈들보다 납작 엎드린 작은 놈들이 더 잘 버텨내지요.”
풀들도 얼마나 땅을 움켜잡았다 놓았는지 시들시들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도와드릴 게 없냐고 물었다 “저 종 좀 풀어주세요.”
종각 기둥에 당목(撞木)이 굵은 줄로 단단히 묶어져 있었다. 종을 울리지 말라고 묶어 놓았단다. 태풍 때문에 당목이 자꾸 종을 건드려 밤새도록 온 사방에 울음을 쏟아 놓아 절간 식구들의 잠을 설치게 하더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묶었다고.

한바탕 고통을 겪고 지나간 종과 당목의 모습이 숙연하게 다가온다. 묶어 놓은 줄을 푸는데 당목의 몸이 종 쪽으로 스르르 기운다. 종소리의 여음이 손끝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소리를 묶어 두었구나. 묶인 건 소리였구나. 여태까지는 소리의 주인으로 종의 공덕만 앞세웠는데 당목의 의미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공모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종이 잠들지 못하고 울린 것은 제 소리만 하려는 것이었을까. 절간 한 편에 서서, 큰 바람 앞에 어쩌지 못하고 고통을 겪어야하는 말 못하는 뭇 생명들의 아픔을 보며 대변하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에는 음모를 지닌 힘 있는 자들이 바른 소리를 묶어버리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소리다운 소리가 그들의 횡포에 묶이고 사라지고 했겠는가. 개인사 울음이 아니다. 공생 공존의 울음이다. 세상의 아픔을 위무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종과 당목이 합세하여 빚어내는 소리다.

고등학교 불교학생회 시절 나는 예불 시간이면 자주 절을 찾곤 하였는데, 이유 중 하나는 범종 소리 때문이었다. 종소리가 울릴 때면 그 저음부는 땅을 울리고 내 존재의 밑바닥부터 건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깊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나를 통째로 울리고 투과하여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떤 것에서도 체험할 수 없었던 묘한 느낌이었다.
종이 울리면 숲이 흔들리고 산이 울렸다. 종이 내는 소리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울림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은 몸체 아래쪽에 귀를 열어두고 수많은 존재들이 인연의 바람을 만나 내는 소리를 품었다가 제 속으로 삼키고 삭히고 돌려서 내는 게 아닐까. 산도 그 소리를 알아듣고 깊고 넉넉한 품에 안아 제 속에 공존하는 많은 존재들에게 들려주고, 다시 그들의 울림이 돌고 돌아 산을 가득 메우는 둥근 우주의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 날도 종각 근처에 얼쩡거렸다. 종에 닿는 당목의 몸놀림과 함께 휘날리는 스님의 장삼자락은 참으로 멋진 춤사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종에도 중심부가 있는지 어떤 부분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의 강도와 질감은 달랐다. 유심한 마음으로 그 곁을 빙빙 도는 내 속내를 읽으신 듯 스님께서 당목을 건네주셨다.

사찰의 사물의식 중 법고(法鼓)는 가죽을 지닌 동물 또는 축생을 위하여, 운판(雲板)은 날짐승, 목어(木魚)는 수중 생명, 범종(梵鐘)은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가 생기게 하고 지옥중생까지 제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셨다. 이타(利他)의 마음으로 정성껏 쳐보라고 하셨다. 살면서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을 위하여 진정으로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위로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있는 힘을 다 모아 종을 쳤다. 멋진 때림이었다. 종소리는 먼저 내 몸을 울리고 세상 속으로 퍼져나갔다. 종을 통해 내가 울린 소리가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스님께서 어린 녀석이 기운이 좋다고 하시며 다음에도 절에 오거든 종을 맡으라고 하셨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주말 오후, 때론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예불에 맞춰 어둑한 산길을 더듬어 절을 향하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침을 밝히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고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많은 용기와 기운을 주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둔 염원 하나, 내가 울리는 종소리가 저 세상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닿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으로 치고 또 쳤다. 그리고 나는 종의 울림을 통해서 소리를 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배웠다.

태풍으로 어질러졌던 뜰이 보살핌의 손길들로 인해 어느새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옛 추억에 잠기며 종과 당목을 쓰다듬어 본다. 세상에도 수많은 당목과 종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산을 울릴 수 있는 종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울릴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종과 당목과 같은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더 나아가 세상의 당목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종이라면 더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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