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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판
우 광 미
새벽을 가르며 팽창된 소리가 울린다. 차갑다. 지판 위에서 자신의 음을 찾지 못한 네 줄은 화음을 이루지 못한다. 팽팽하다. 줄 간의 합의점을 찾아야만 한다. 지판은 구도자다. 끝임 없는 오류와 번민을 받아들이고 잠재운다. 지판 위에는 정해진 구역이 없기에 수없이 반복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후, 본능적인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야만 정확한 음을 짚어낼 수 있다. 기타와 달리 바이올린 지판 위에는 플랫이 없다. 플랫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제 몸을 지판 위에 깊이 박고 음계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은 테이프로 임시 플랫을 지판 위에 붙인다. 찾아내려는 소리의 지점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시각에 의존한 소리가 기억되면 그 테이프를 떼어내고, 청각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찾아내야 한다.
정확한 음의 구간들을 찾아가게 하는 플랫이 삶의 구간들에도 있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때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지해서 자신의 감각을 열지 않으면 지판 위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갇히게 된다. 내 마음 속에도 그런 테이프를 오랫동안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내게 그런 분이셨다. 지판 위를 스스로 짚을 수 있을 시점에도 항상 계셨다. 나는 머뭇거렸고 정확한 지점에 올려놓고도 조바심을 냈다. 지금 되돌아보면 삶의 진실들은 지판의 맨바닥에서 헤매기도 하고, 헛짚어 다른 소리를 내게 되는 나의 시행착오 속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연주를 하게 된다. 같이 연주를 하는 동안 박자에 맞추어야만 한다. 박자는 삶이 진행되는 시간을 헤아리는 단위일 수도 있다. 본질과 교통할 수 있는, 모든 합의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느린 박자도, 휘몰아치는 빠른 박자도, 각각의 길이는 독립되어 있지만 지판 위에서는 공존하여야 한다. 처음에는 오롯이 내 소리에만 집중하느라 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차츰 남의 소리가 들리고 그것에 나의 소리가 되비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고정관념의 탈피를 통해, 닫힌 상황을 벗어나 외부와 연결된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느낀다는 건 외부대상으로부터 반증되어 오는 모습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면으로 다시 순환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가 지닌 양면성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본질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항시 오감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판은 통속적이다. 악보를 벗어나고 선율을 이탈하는 악기소리처럼 누군가와 반드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욕망은 때때로 다른 이와 갈등하고 충돌하며 합의점을 찾으려 한다. 삼류 유행가 가사부터 심오한 철학이론까지 관통하는 삶의 통속성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한 맥락인지도 모른다. 내가 찾고자하는 지판 위의 한 점일 수도 있다.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팽팽함과 느슨함이 알맞아야 제 소리를 내며 세상으로 나간다.
삶도 지판 위의 줄처럼 단번에 조율되지 않는다. 조율해 둔 줄도 짚다보면 느슨해진다. 느슨해져 제 음역을 잃어버린 줄을 다시 잡아당겨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연주 도중에 조율은 허락되지 않고 잘못 짚은 음은 인생처럼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놓쳐버린 박자의 생각으로 자신을 가두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내면과 교통하여 끊임없이 상대의 소리를 듣고 벗어난 화음이 되지 않아야 한다. 연주자끼리의 교감과 소통은 우리 내면의 깊은 상처와 갈등을 치유시키고, 화려한 기교의 비브라토가 없는 소박한 선율일지라도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화려한 솔로만 돋보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똑같이 어려운 선율을 연주해야 하는데도 솔로가 돋보이도록 낮은 음역 대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위대한 화합이고 아름다운 울림이다.
삶도 사람과 시간을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우리는 현실이란 지판 위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한다. 본질과 교통할 수 있을 때 누군가의 음을 찾아가게 하는 이념의 이정표 같은 플랫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판 위에서 찾은 삶의 다양한 경험과 사상들은 우리의 가슴에 전달되어, 그 울림통 속에서 오랜 세월 습기도 머금고 상처도 가지면서, 자신을 마찰시키고 담금질했을 때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는 따뜻한 소리가 베어 나올 것이다.
활을 들어 두 줄씩 동시에 켠다. 연주전에 갖는 의식이다, 현들을 조율하기 시작한다. 각각의 소리는 줄감개의 조절로 합의점을 찾는다. 공명상태의 여음이 따뜻한 소리를 내며 새벽을 가르고 세상으로 나간다.
※비브라토: 기악이나 성악에서 음을 상하로 떨어 아름답게 울리게 하는 기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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