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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수]'장목면지에 대한 소고<2>'재미동포/미주방송인협회/여의도 클럽 USA/사무총장 양 방수/장목면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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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09  13: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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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목면 연혁에 대한 이야기

   
양방수씨
장목면지에 기록된 <1470년(조선조 성종원년) 거제현에 七鎭(칠진)을 두었는데 장목진, 영등진, 율포보를 두고 鎭(진)에 萬戶(만호) 또는 別將(별장), 堡(보)에 權管(권관)을 두어 軍政(군정)을 하였다>는 내용도 아니고, <임진왜란때 통제사 이 순신이 장목진에서 전략을 숙의하던 鎭營舍(진영사)>라는 내용도 아니다. 참고 자료를 공개 한다.

한국 最古(최고)의 東國地圖(동국지도) 공개
東國地圖(동국지도)란 1434년 李朝(이조) 世宗(세종) 16년에 梁誠之(양성지) 鄭陟(정척)등이 왕명에 의하여 만든 한국의 지도로 이의 기초사업으로 각도의 守令(수령)에게 명하여, 그 지방의 위치 산맥의 방향, 도로의 里數(이수), 인접 各(각) 郡(군)과의 접경 등을 자세히 그리어 중앙에 보내게 하였다.

   
 
이에 의하여 鄭陟(정척)은 畵工(화공)들을 데리고, 現地(현지)를 踏査(답사)하면서 실지 조사를 끝마치고, 梁誠之(양성지)등의 협력을 얻어 완성하였다. 지난 1991년 10월 11일 금요일 신문에 공개한 우리나라 最古(최고) 東國地圖(동국지도) 발견이라는 기사를 보고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가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게 필자가 입수한 자료이다.

신문 내용을 살펴보면 국내에서 간행된 最古(최고)의 우리나라 地圖(지도)가 발견됐다. 서울대 奎章閣(규장각)은 최근 소장 자료중 現存(현존) 最古(최고)의 우리나라 지도로 추정되는 [東國地圖(동국지도)]를 발견 10일 일반에게 공개했다.

36,3mX24.2cm크기로 木版本(목판본) 32쪽 1책으로 된 이 지도는 郡縣(군현)의 명칭, 鎭堡(진보)의 상황, 邑記(읍기)의 이동 경위 등 내용을 보아 1535년~1543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1535년 을미년 中宗(중종)30년-1543년 계묘년 中宗(중종)38년 사이에 간행한 지도>

   
 
따라서 지금까지 국내의 최고의 지도로 알려져온 國寶(국보) 248호의 [朝鮮方域地圖:조선방역지도:1557년경 간행]보다 10여년 앞서는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學界(학계)는 밝히고 있다.

지도상에 나타나는 거제진은 다음과 같다.
(1) 玉浦(옥포) (2) 永登浦(영등포) (3) 助羅浦(조라포)(4) 知世浦(지세포) (5) 栗浦(율포) (6) 三千鎭(삼천진)등이 보인다. 加背梁도 이때는 固城에 옮겨 있었다. 지금까지의 巨濟의 史料에는 三千鎭이 巨濟에 있었다고 기록된 文獻은 처음이다. 이런 문헌이 있는데도 찾아 보지않고 남이 쓴 글에 덧붙혀 추측해서 거제 역사나 장목면지를 발간하였다는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1470년(성종원년) 거제현에 七鎭(칠진)을 두어 장목진, 영등진, 율포보를 두고 鎭(진)에 萬戶(만호) 또는 別將(별장), 堡(보)에 權管(권관)을 두어 軍政(군정)을 다스렸다면 1535년 을미년 中宗(중종)30년-1543년 계묘년 中宗(중종)38년 사이에 간행한 지도에도 長木鎭(장목진)이 나타나야 믿을수가 있다. 이것은 명백한 위증이다.(참고문헌) :

巨鎭(거진) : 이조대의 軍營(군영)으로 節制使(절제사)와 僉節制使(첨절제사)가 있는 鎭營(진영)을 말하며, 위로는 節制使(절제사)가 있는 主鎭(주진)이 있었고, 巨鎭(거진)밑에는 同僉節制使(동 첨절제사),萬戶(만호), 都尉(도위), 駐在(주재)하는 여러鎭(진)이 있었다.
主鎭(주진) : 節度使(절도사)
巨鎭(거진) : 節制使(절제사), 僉節制使(첨절제사),
諸鎭(제진) : 同僉節制使(동첨절제사), 萬戶(만호), 都尉(도위),가 駐在(주재)했음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巨濟島(거제도)의 古縣城(고현성)은 함락되고 불타버려 1664년 18대 顯宗(현종:5) 甲辰(갑진)년에 官廳(관청)을 復建(복건)하면서 李東耉(이동구) 巨濟(거제) 縣令(현령)이 巨濟面(거제면)으로 縣(현)을 옮겼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간의 戰爭(전쟁)으로 倭賊(왜적)의 소굴로 변한 長木(장목), 軍港浦(군항포) 甑城(증성:시루성=지금의 농바우)을 위시하여 舊永(구영) 등은 사람들이 扶支(부지)할수 없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1656년 17대 孝宗(효종: 7) 丙申(병신)년에 統制使(통제사) 柳赫然(유혁연)이 王(왕)의 命(명)을 받고, 巨濟島(거제도)의 地形(지형)과 民心(민심)을 살피고, 狀啓(장계)를 올려 지금의 長木(장목)에 長門浦陳(장문포진)을 세워 처음에는 武官(무관) 從九品(종구품)인 別將(별장)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고, 戰船(전선) 1척, 兵船(병선) 1척 伺候船(사후선) 1척을 두었다.

그 후에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 했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 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主幹者(주간자)라고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 기록하고 있다.<참고: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한것은 武官(무관) 從九品(종구품)인 別將(별장)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고, 戰船(전선) 1척, 兵船(병선) 1척 伺候船(사후선) 1척을 두었다>.

뒤에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운집은 鎭(진)으로 創設(창설)하여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長木鎭(장목진)을 수비케 하였다. 고로 엄연히 陳(진)과 鎭(진)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歷史(역사)에 나오는 壬辰(임진)년 해는 다음과 같다.
단기 3685년 서기 1352년 고려 恭愍王(공민왕) 2년 壬辰(임진)년
단기 3745년 서기 1412년 조선 3대 太宗(태종) 12년 壬辰(임진)년
단기 3805년 서기 1472년 조선 9대 成宗(성종) 3년 壬辰(임진)년
단기 3865년 서기 1532년 조선 11대 中宗(중종) 27년 壬辰(임진)년
단기 3925년 서기 1592년 조선 14대 宣祖(선조) 25년 壬辰(임진)년
단기 3985년 서기 1652년 조선 17대 孝宗(효종) 3년 壬辰(임진)년
단기 4045년 서기 1712년 조선 19대 肅宗(숙종) 38년 壬辰(임진)년
단기 4105년 서기 1772년 조선 21대 英祖(영조) 48년 壬辰(임진)년
단기 4165년 서기 1832년 조선 23대 純祖(순조) 32년 壬辰(임진)년

지난 2011년 11월에 발행한 장목면지를 보고 고향 후손들이 바른 역사관을 볼수 있도록 몇가지 지적하고저 한다. 지나간 거제군지나 장목면지는 붓대를 잡은 사람들이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고집 불통이 되어 제멋대로 역사에도 없는 사실을 만들어 개인의 치적을 쌓는데 급급하여 역사는 점점 왜곡 되어졌다.

집안에 족보가 없어 자손들 보기에 민망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만들다 보니 홍길동이가 할아버지가 아닌데도 홍길동이가 할아버지라고 버젓이 기록하여 자손들이 혼란스럽게 만든 집안이 있다. 그래서 우리 선대 조상이 만든것이니 맞던 틀리던 그 후손들은 무조건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니 틀려도 맞다고 억지를 쓰는 사례는 우리 양씨 가문에도 있고 주위에 흔히 있는 일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맞다 틀리다. 다투다 보니 우리 사회는 분열이 생긴다. 한 집안에서도 서로 원수가 되어 잘하고 있는데도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내가 하는 일은 옳고 남이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잘못된 생각은 고치지 않고 그릇된 사회를 만드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번 장목면지가 출판되기전에 故(고) 김 기태 은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識字憂患(식자우환)인가? “장목면민들이여 ! 이것만은 고쳐야 한다”라는 제하의 칼럼을 거제타임즈에 올린 내용을 김 기태 은사님께서 보시고 향토 사학가 이 승철씨에게 전하게된 동기가 발단이 되어 장목면지가 장목면 생기고 처음이고 우리 세대에 마지막이라는 절박감에서 다시 정리를 해 본다.

필자가 처음으로 장목면 역사를 접한 것은 평소에 親分(친분)이 두텁던 金鍾碩(김 종석) 長木(장목) 海東醫院 病院長任(해동의원 병원장님)께서 鄕土史(향토사)에 關心(관심)이 많아 長木面 (장목면) 文化財(문화재) 推進委員會(추진의원회) 委員長職(위원장직)을 맡아 長木陣 客舍(장목진 객사)를 1980년 1월 14일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 委員會(위원회)에서 地方(지방) 有形(유형) 文化財(문화재) 제189호로 지정 받아 1981년 12월 8일 午前(오전) 10시에 국고지원으로 上梁式(상량식)을 거행 하셨다면서 복원 당시 客舍 上梁文(객사상량문)을 발견하였다면서 사본을 주셔서 보관된 자료에서 장목면 역사를 소상하게 읽을수가 있어 1990년 9월 30일에 在京 巨濟鄕人會가 發行한 巨濟郡誌에도 필자가 지적 했었다.

객사 상량문에는 서기1656(효종 7)병신년 陣(진)을 세운 후에 1712년 壬辰年(임진년=숙종 19)년에 鎭(진)을 創設(창설)했으나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집을 지을 수가 없어 1717(정유년 숙종 24)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정조 9)을사년 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 別將 禦侮將軍(행 별장 어모장군:정 3품) 李 珍國(이진국)이 主幹者라(주간자)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장목면 객사의 연혁이 왜? 틀리게 되고 엉뚱한 막말을 하게된 것인지 거제향토 사학가이신 이 승철 선생님의 편지를 소개 한다.

양 방수 선생님이 보내 주신 자료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내용은 가급적이면 그대로 싣도록 하겠습니다.

장목진 객사에 대해서 몇번이나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 합니다. 장목진 객사를 장목면 사무소로 사용 하다가 장목면소를 동구로 옮기면서 서구회관으로 사용 해 왔는데 1979년 폭우로 동쪽 지붕이 붕괴되어 방치해 둔 것을 거제군 재무과에서 매각 처분(남은 부분) 할려고 공고를 내어 놓으니까~ 그 집(객사)을 뜯어다가 재실을 짓겠다고 여러 문중에서 앞 다투어 나섰습니다.

그소식을 듣고, 제가(이승철) 경남도 문화재과에 연락하여 문화재 전문위원을 급파게 하여, 긴급 가지정 신청을 함으로서, 매각 처분에서 겨우 붙들어 놓았습니다.

그런후에 김종석 해동병원 원장님을 장목진객사 보존추진위원장으로 추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것도 제가 김기곤 면장과 김현기 전 면장 등 주민들을 설득하여 장목면 사무소에서 결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종석은 남해 사람인데 장목 사람을 시켜야 한다며 반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동아대학교 이용현 문화재 전문위원이 와서 장목진 객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목진 객사의 기와가 嘉靖시대 것이라 하여 앞전 임진년이면 1592년 일것이라 하였고, 이순신이 객사에서 전략을 논의 하였다고 한 것은 난중일기에 장목항에서 왜적과 싸운 기록이 있다고 하여 문화재 전문위원이 단정 해 놓은 것입니다.

아무 근거도 없은것을 무지한 향토사학자가 침소 봉대 해 놓은 것 같이 말씀 하시는데, 그 문제는 더 두고 보면서 정학한 사실이 밝혀 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가지 기록문도 당시 기술하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점도 있고, 편파된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막말로 그 당시 봤느냐 하면 할 말이 없지요, 지도도 엉터리가 너무 많고요, 기록문도 다른 점이 너무 많습니다. 잘 해 놓았다고 하는 기록문 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가 더 정확 한 부분도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이나 자료에 의하여 단정 지으려고 하는 것도 때로는 잘못된 아집으로 나타 나기도 합니다. 장목진객사의 상량문도 김현기 면장이 면사무소에 보관 해 둔다고 한 것이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고건물을 옮기면 옮길 때 마다 상량문을 작성 합니다.

거제기성관 상량문도 3매가 발견되었는데 마지막 1매는 소장지가 앞전 샹량문을 넣어 놓은 그 아래쪽에 상량을 파내고 넣어 두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날 번 했습니다. 73년경에 해체 복원 할때는 제가 주장을 하여 한곳에 4매의 상량문을 같이 넣어두었습니다. 장목면지에는 장목진객사에 대한 내용은 상량문 대로 기록을 옮겨 놓았습니다.

향토사랑에 대한 양선생님의 옳으신 생각은 저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의적으로 다르게 하겠습니까? 모르면서 아는체 하고, 기록을해 놓겠습니까? 모르면서 아는체 하고 기록해 놓는 것 만큼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장목에 대한 좋은 자료 보내 주시면 이번 기회에 장목의 역사를 바로 실어 놓겠습니다. 좋은 자료 부탁 합니다. 양씨 문중 자료 부탁 합니다. 건강과 해운을 빌면서 ~거제도에서 이승철 배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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