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은 혜

소설가 한승원
그는 내게 거침없이 ‘해산토굴(海山土窟)’로 다가왔다. 기이하게 땅 속에 굴을 파놓고 그 안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장흥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라 그의 집필실에 붙은 당호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인 ‘해산토굴(海山土窟)’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만 빌려본다.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부처님을 모신 곳을 찾는다. 왜냐하면 ‘토굴’은 불가에서는 스님이 고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토굴’에서 부처님과 고행을 떠올렸다. 또 하루는 웬 사내가 찾아와, 이곳에서 새우젓을 파느냐고 묻는다. 새우젓은 토굴 안에 저장하고 장시간 곰삭히기에 비롯된 이야기다. 이 사내는 삶의 현실에서 토굴을 인식했던 것이다.
한승원 선생님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의 눈높이에 따라 사물이 보인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파도만 보지 말고 물을 보라는 말로 요약하여 적어도 문인은 ‘현상을 적지 말고 실체를 적어야 함’을 우리에게 깨우치려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벌써 십여 년이 넘었는데, 자꾸만 현상에 머무는 나의 눈높이에 부끄러울 뿐이다.

소설가 이청준

—저 장흥 땅 진목리 잔등 타고 내려간/ 노을 아랫목이 여직 따땃한 것이/ 어째 당신이 저쯤에서 소주상 미리 봐놓고/ 짐짓 기둘리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황지우 추모시 <거룩한 염치>에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어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그의 작품이 우리 품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가도 그가 남긴 작품은 영원히 독자들의 머릿속에 살아 있어 영혼을 일깨워준다. 처음 가는 그의 생가였지만, 그리 낯설지 않다.
생가를 찾아들어서는 골목길에서 집요하게 우리를 맞아주던 쇠똥냄새. 그 냄새가 제 아무리 고약하다 해도 이청준 선생의 작가혼만 하였으랴. 좁다란 길을 따라 들어가니 골목의 끄트머리에 이청준 선생의 생가가 나타난다. 그리 넉넉지 못했던 선생의 유년시절을 말하는 듯 협소한 마당이 보이고, 앞쪽으로 손바닥만한 남새밭이 있다. 마당가에 세워진 입간판이 생가를 억압하며 위엄을 떨고 있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밀물져 왔다. 선생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데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왤까. 그 위용 앞에 서 있는 생가는 처마도 얇기 그지없고, 처마의 곡선도 휘어져 있다. 작가의 부친이 꾸렸던 힘들었던 삶을 말해 주기나 하듯이. 해마다 이엉을 입혀 썩은새의 두께로도 가세의 힘을 과시하던 시절이고 보면 선생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팍팍했는지 짐작이 간다.
굳게 닫혀 있는 부엌문이 열리면서 모친께서 선생을 부르며 군고구마를 들고 나올 것만 같다. 감나무 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던 선생이 홍시에서 시선을 거두어 모친 앞에 서면 사랑의 고구마가 건네졌을 것이다. 아무 것도 심지 않아 황토만이 널브러져 있는 남새밭. 물론 전에는 그곳에 고구마도 심고 상추도 심었을 것이다. 지금 새로운 작물을 위해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다. 문득 내가 방문한 지금이 선생이 새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말끔히 치워놓은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나도 글쟁이라서 일까.
방문객들은 모두 마당가에서 집을 향해 서 있다. 어떤 이는 방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엌도 살펴보고 있다. 남새밭가 돌에 올라선 사람은 생가의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 우리는 모두 집안을 살펴보며 현실에 부딪치는 사고를 하고 있다. 어려웠던 삶, 작가의 유년시절, 가세의 기울음.
하지만 작가 이청준 선생은 이 마당가에서 집 쪽을 더 바라봤을까, 집 앞 회진 앞바다를 더 바라봤을까. 앞에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온 안개가 자욱이 마당에 깔리면 불신의 현상에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촌부들의 끝없는 삶의 고통 속에서 우리 가락과 삶의 진정성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을까. 같은 장소에서 세상을 바라보아도 속세의 일에 묶이고 마는 우리가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사물을 봐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기에 작가는 존재하고, 그들이 생산해낸 작품은 영원한 것이겠지.

편백숲 우드랜드

실은 이번 문학기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은 이곳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누드 산림욕장’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누드’라는 말에 설복 당해 있었다. 과연 동방예의지국에서 ‘누드’라는 말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긴장한 나에 비해 ‘우드랜드’는 담담하게 우리를 맞았다. 쭉쭉 뻗은 편백 숲으로 빨려 들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입구를 들어서서 조그마한 방갈로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의 불안감은 모두 사라지고 온 김에 한 사나흘 쉬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돌층계가 아닌 목재 산책길을 걸으면서 편백향에 깊이 젖어보고 발밑에 심어놓은 야생화를 보면서 진정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개발하더라도 상처를 덜 내면서 공생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죽 걷도록 시설해 놓은 산책로에서 자연 훼손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산림욕에 젖어 깊은 휴식을 맛보았다.
한 바퀴 돌아 출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시 정신을 움켜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 얼마나 ‘누드’라는 어휘가 나를 따라다녔는가. 그런데 나는 우드랜드를 한 바퀴 돌아 나올 때까지 한번도 ‘누드’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정말 실체에 깊이 들어가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은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이는 순간, 엊저녁 한승원 선생이 한 말씀이 생각났다.
—파도만 보지 말고, 물을 보아라.
여다지 해변에 밀려왔던 파도가 잦아들며 잔잔히 너울대는 물이 내 뇌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 약력 █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수필과 비평 문학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 “견습일지”
“비 오는 날의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