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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곽호자] 남겨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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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23  14: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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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말
                                                                          
     곽 호 자

   
 
드라마 ‘뻐꾸기 둥지’를 본다. 불임인 며느리를 대신해 대리모의 몸을 빌려 후손을 이으려는 시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 전개된다. 화면에 집중하다보니 외숙모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따스함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은 늘 칙칙해 보였다. 근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신병이 있는 듯도 하다. 가까이 다가오시기라도 하면 나는 두려워 오소소 몸을 떨었다. 칠거지악이니 해서 얻은 외숙모님의 우울증이란 걸 철이 들면서 깨달았다.

양자로 입적된 외삼촌은 연로하신 외조부님이 돌아가시자 큰방을 차지하셨다. 건강이 좋지 않아 늘 약봉지를 달고 지내셨다. 석청 꿀단지를 선반에 올려놓고 외출한 사이 슬쩍 한 숟갈 떠먹은 것이 들통 나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까짓 게 뭣이라고 눈을 부라리시던 그 야박함이 서운해 눈물을 훔쳤다. 외삼촌 내외분이 남보다 못하다고 어머니에게 기회만 나면 구시렁거렸다. 그러던 중 집안에 사건 하나가 생긴 모양이었다. 조용조용 집안이 술렁였다. 나만 빼고 함구령이 내린 양, 말들을 아꼈다. 외숙모님이 외삼촌께 ‘씨받이’를 추천하게 된 것을 나중에 알았다. 혈통을 잇는 명분이 이해되지 않을 나이 때다.

드디어 외삼촌 대를 이을 ‘상국이’가 태어났다. 병약한 낯에 화색이 돌던 외삼촌. 씨받이 집으로 가는 날이 빈번해졌다. 외숙모님이 묵인할 리가 없었다. 남편도 아이도 씨받이 곁에서 떼어 놓았다. 아이를 만나보기 위해 생모가 왔다. 계약에 없는 짓이라 냉정하게 그녀를 돌려보냈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쑥쑥 컸다.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않았던지 외숙모님은 가족과 함께 수원으로 이사해 버렸다. 남편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는 한 방편이었으리라.

삼촌의 부음이 전해진 것은 이사를 간 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이였다. 석청을 몰래 먹다 혼나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외삼촌의 죽음이 가슴을 울리지 않았다. 숙연함이 묻어 나오질 않아 흰 광목 상복을 입고서도 사촌들과 어울려 사진 찍기에 바빴을 뿐이다.

상국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소식이 왔다. 대학 진학을 하려니 했는데 뜬금없이 내가 사는 곳으로 내려왔다. 옷차림이며 얼굴을 보아하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내려온 연유를 캐물었다. 어머니가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석연치 않아 다시 물었다. 버림을 받았다는 대답대신 그냥 울먹였다.

알고 보니 상국이의 시력은 절망적이었다. 몇 군데를 둘러본 안과에서 내린 판정은 같았다고 한다. <선천성망막색소변증.> 망막이 위축되어 중심시력을 나타내는 황반부에 변성이 오다 결국 시력을 잃는 무서운 안질환을 아이는 앓고 있었다. 외숙모님은 이렇게 된 아들을 부양하려 들지 않았다. 키워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이곳으로 내친 모양이었다. 등 떠밀어 외삼촌을 씨받이에게 보낸 것은 언제이고, 이 아이는 어쩌자는 것인지. 잔인한 어른이었다. 병든 자식을 버리는 일.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었다.

갓 결혼해 전셋집을 면치 못한 처지여서 아이를 집에 들이지 못했다. 집 근처 지하 방을 얻었다. 십시일반 도우려 했지만 아이에게 큰 혜택을 주기 어려웠다. 과외를 주선했다. 기타를 치며 외로움을 삭히는 듯했다. 과외 학생들이 줄어들었다. 시력이 그 모양이니 입소문을 탄 것이다. 먹고 자는 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뭉그러지는 체험을 겪으면서 한 점 희망을 아이는 갖고 있었다. 서울로 다시 가려니 하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락은 더 이상 오질 않았다.

상국이가 죽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상국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내버려진 한 가여운 생명이 시체로 둔갑해서 내 앞에 있다. 심장 소생술이며 위세척 등으로 망가진 몸이 상의도 벗어던진 채 세상을 향해 항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대고 지르는 말은 점점 더 큰 소리로 내 가슴으로 다가온다.

상국이는 제 한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그 절박함을 외면한 것은 먼저 나였다. 식구로 받아들여 가족이란 울타리로 안아 들였더라면, 내 아이들과 어울리게 했더라면 아마 죽지는 않았을 게다. 나는 이기적으로 가족관계의 선을 고집한 사촌 누나였을 뿐이다.

상국이의 인권은 결국 유린되었다. 아들을 얻기 위해 병중의 남편을 졸라 얻은 아이. 그 혈통에 건 기대는 인간의 욕심일 뿐이다. 기대에 못 미치니 외면하는 모성은 짐승만도 못하다. 나 역시 공범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곳에 오면, 누나가 있으니까.
이곳에 오면, 반겨줄까 해서.
이곳에 오면, 행여 엄마란 분을 만날까 해서.
이곳에 오면, 시력이 낳을까 해서.
상국이는 희망을 가지고 왔지만, 어느 것 하나 얻지 못하고 저 먼 곳으로 떠났다.

드라마 화면에 독기를 품은 여자의 얼굴이 외숙모님을 연상케 한다.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한 가정의 비극이 전개된다.
공수래공수거.
 

- 약력-

- 경남 거제 출생/수필가
-초등학교 교사 역임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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