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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심인자]'카드를 그으며'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작가상 수상/계룡수필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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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31  17: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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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를 그으며
                                                                                                      심 인 자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다. 언제쯤이면 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설 수 있을까. 머리에 인 보따리가 힘겨워 점점 자라목이 되어간다. 이마에 맺힌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닦아내고 싶지만 양 손에 든 짐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받쳐줄 돌덩이 하나 보이지 않으니 쉴 수도 없다. 내려놓는 순간 사정없이 산 아래로 굴러갈 짐 덩이를 생각하니 느슨해진 두 손에 힘이 가해진다. 여인네더러 조금만 더 힘내라며 해가 마지막 빛을 길게 비추고 있다.

게검스럽게 자꾸 식탐이 인다.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평소에 잘 먹지 않던 튀김종류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해물 찜도 뇌리를 스치며 허기진 배를 자극한다. 벗어나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데, 비아냥거리듯 생선회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춘궁기라 그런가. 뭐든 다 먹고 싶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떨쳐내려 하지만 배가 고프니 청하는 잠마저 멀찍이 달아나고 만다.

도사린다. 웬만한 식사약속은 하지 않으려 고민한다. 한창 왕성한 시기에 나 홀로 보릿고개를 오르고 있다. 남는 게 없다. 적금에 각종 공과금과 큰아이의 생활비를 떼고 나니 적자다. 조금씩 모아둔 비상금마저 뜻밖의 지출로 바닥이다. 달리 방안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장롱 깊숙이 팔을 집어넣으니 손 가락 끝에 와 닿는 익숙한 촉감, 신용카드다. 얼마 만에 빛을 보는 걸까. 한동안 두문불출 했으니 갑갑했을 터이다.

나 어릴 적, 병약한 아버지는 궁여일책으로 농사를 정리하고 가게를 열었다. 동네에 하나뿐이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집 가게를 이용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늦은 저녁에 하는 일이 있었다. 장부 정리였다. 일일 장부에 이름을 적고 품목과 외상금액을 기입했다. 그 내용을 개인 장부에 다시 기입하면 장부정리가 끝났다. 일 년에 몇 차례 외상값을 받으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게 내가 맡은 또 하나의 일이었다. 장부정리는 얼마든지 하겠는데 외상값 받으러 가는 일이 고역이었다. 그 때마다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아버지의 호통에 쫓기듯 대문을 나서야 했다. 어린 나를 보냈으니 어른 만큼 일을 쳐냈겠는가.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빈손에 미안한 마음을 얹어 받거나 나머지를 조금 남겨놓고 받기도 했다. 내일 가져 갈 터이니 그리 알라는 말에 발길을 돌리기도 했는데, 마른 장작이나 농산물로 외상값을 대신해 왔다.

직접 가면 될 일을 왜 어린 나에게 시키는지 원망스러웠다. 갚지 못해서 난처해하는 동네 어른들이 안쓰러웠다. 맞닥뜨린 친구의 붉어지는 얼굴을 보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애먹었다. 마치 오줌 싸고 키를 둘러쓴 채 소금 얻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사람을 부르니 기척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누군가 대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어른이 되면 외상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거라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세월이 흐르니 알 것 같다. 외상값 받아오라는 아버지 마음인들 편했겠는가. 굳이 어린 나를 보낸 것은 혹여 불미한 일이 생길까 해서였다. 어른들끼리 언쟁도 피하고 이웃 간에 벽 쌓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외출준비를 서두른다. 생활비가 동났으니 다음 월급날까지 카드로 대체할 생각이다. 장롱에서 꺼낸 카드를 빨간 지갑 속에 하나하나 꽂는다. 돈보다 카드 위주다. 남편이 가족카드라며 만들어 준 것도 있고, 통사정하다시피 하는 카드사 직원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만든 것도 여러 장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카드가 제 것을 선택해 달라 아우성이다. 오늘은 포인트를 배로 올려주거나 내가 구입하고자 하는 물건에 할인이 되는 카드를 쓸 것이다. 번거롭긴 하지만 카드를 선택해서 사용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득이 되는 포인트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한 때, 멋모르고 카드를 사용했다. 돈을 바로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사들였다. 백화점에서든 레스토랑에서든 카트 한 장만 내밀면 정리가 되었다. 그게 재밌기도 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결과물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부담 없이 쓰다 보니 턱없이 과소비를 한 것이다.  카드는 분명 매력이 넘치는 외상장부다. 그런데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여지가 없다. 시골 가게의 인심처럼 주면 받고 미루면 또 미루는 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다. 외상을 한 후 기한 내에 반드시 갚아야 한다. 안 그러면 높은 이자와 함께 자칫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여지없이 거래가 중단된다. 그 무서움을 안다. 그래서 정말 힘들 때만 카드를 꺼낸다. 평소엔 장롱 깊숙이 숨었다가 내가 부르면 쓴 소리 없이 주인의 궁색함을 감싸준다. 고맙긴 하지만 인정사정이 없으니 갚을 수 있을 만큼만 사용해야 한다. 에누리 없는 인색한 외상장부이기에 말이다.  마트에 간다. 춘궁기에 보릿고개를 넘는 아낙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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