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석

뒤늦게 철이 들어 고전(古典)에 시간을 주고 있다. 그동안 무던히 바쁘다고 느끼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그걸 가지고 그리 엄살이었나 싶다. 이제는 좀 마음을 살찌우며 사는 게 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자질구레한 잡념들을 내몰고 있다. 잊고 살았던 고전을 펼치니 첫 줄부터 맹랑하다.

‘삼월 춘풍 호시절에 행화 봄철이 다시 돌아오니, 꽃은 피어 만발하고 잎은 피어 청산이 되니 나비도 날고 벌도 난다.’

그동안 내 삶에서 잊고 살았던 어휘들이 도사리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다. 정말 계절의 바뀜도 모르고 산 게 분명하다. 언감생심 내 일상의 빈틈으로 비집고 끼어들지 못하던 어휘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온다. ‘삼월’, ‘춘풍’, ‘행화’, ‘봄철’, ‘꽃’, ‘청산’, ‘나비’, ‘벌’…….

아무 생각도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 그래, 정말 열심히 살았다. 계절만 잊은 게 아니고, 내 생일마저 잊고 살았다. 그 누구보다 한 걸음 더 가기 위해 나를 학대하다시피 부지런히 살았다. 모자라는 수면시간을 덜어내어 이른 새벽부터 다부지게 뛰었고, 눈물짓는 몸부림은 탈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야 무엇이든 하나 더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다른 이에 추월당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저녁의 삶은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누군들 일찍 퇴근하여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즐기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식구들의 얼굴을 지켜보고 싶고, 어린 자식들의 재롱을 등에업고 동네 한바퀴 돌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러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욕심을 뒤로 물리며 열심히 야근까지 챙긴 삶이었다.

삼월이 그토록 좋은 줄을 차마 몰랐다.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세상의 생명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소생의 기쁨을 나눈다. 없는 듯이 잠에 빠졌던 풀뿌리도 새싹을 밀어 올리고, 마을 숲의 잡목 가지 끝에서는 겨울옷을 벗어 던지고 나들이 꾼들을 맞을 채비에 바쁘다.

봄을 맞는 마음이 다 같으랴. 성미가 급한 자와 느긋한 자가 있다. 감정이 민감하여 조급한 나머지 이파리도 나오기 전에 꽃부터 챙긴 죄로 꽃샘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게 있는가 하면, 남들 다 벌 나비와 봄놀이 다녀오도록 늦잠에 빠졌어도 제외되지 않고 결실의 기회를 얻는 것도 있다. 대부분 이파리가 돋기 전에 꽃을 피우면 열매를 얻지 못한다. 개나리, 진달래의 조급증을 보라. 그래도 전생에 많은 덕을 쌓은 벚나무는 행운안가 보다. 이와는 달리 아예 꽃이든 이파리든 관심 없이 느긋하게 드러누웠다가 일어서는 것들에게는 열매를 얻을 기회를 준다. ‘대추나무 음 틀 때 딸네 집에 가지 마라.’는 속담까지 얻은 느림뱅이를 보라. 열매를 맺어 빨갛게 익힐 기회까지 누린다.

이같이 서두르면 열매 맺지 못함을 알면서도 새벽부터 일을 챙긴 삶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것도 저것도 모두 빼앗겨버린 기분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의 욕구를 모두 앗아간 현실이 좌절에 빠지게 한다. 처음에는 나만 정신 차리면 되겠지, 하고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도 나만 중심을 잘 잡으면 살아남겠지, 했다. 사람의 동네에 정신 차리고 걷는 자마저 보기가 힘들다.

삶의 현장에서 갖는 휴식은 봄나들이와 같이 재충전의 기회가 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부여되는 휴식은 재충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휴식은 오로지 무너지고 무너지는 절망의 늪으로 몰 뿐이다. 요즘의 우리 경제는 무작정 무너지는 절망의 멈춤이다. 아무리 경제인이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정치가 꼬이면 그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든다. 새벽잠이라도 반납하고 일찍 나오면 샛별이라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하늘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지금까지 걸어온 나의 길이 홍수로 모두 떠내려간 꼴이다. 언제나 하늘이 맑아지려나 기다리던 마음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오늘도 찬바람 앞에서 이 바람만 지나면 하늘이 열리고 따스한 햇볕이 들려나 기대해 보지만, 다시 절망한다.

내일 아침에는 햇볕을 받으며 하루의 일과를 챙기는 날이 되었으면 하고 꿈을 꿔 본다. 삼월 춘풍 호시절에 벌 나비는 아닐지라도 제대로 된 일터로 나갔으면 좋겠다. 이 삼월이 호시절이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