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세 살 무렵 떠나온 고장이고 가끔씩 제사를 지내러 간간이 들르는 장소이지만 어쩔 수 없이 고향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얼마 전 우리 고향이 방송과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등장했다. 국립 공주박물관에 소장된 국보급 문화재가 강탈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탓이었다. SBS 앵커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무질서와 공황상태에 빠진 바그다드도 아닌데 박물관에서 국보급 문화재가 도난 당한 것이 황당무계하다고 일갈했다. 평소 SBS에 대해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품어온 나로서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꼴보기 싫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부끄러운 이쪽의 치부가 들키면 더욱 황망하고 당황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왕 까발려진 것 고향에 대한 흉 한번 더 봐야하겠다. 정치적으로 공주는 전근대사회에 머물러 있다. 사극에서 지방호족들이 지배권을 대물림하듯 정치권력을 세습하는 봉건적 폐습이 부활한 것이다.

현재 공주시의 지역구 국회의원은 자민련 정진석 의원이다.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자민련판 젊은 피 버전으로 수혈된 인물이다. 언론사에 몸담고 있던 기자들이 취재원이었던 정치권과 형성한 스킨십과 네트워크의 힘에 의지하여 정계에 진출하는 경향에 대한 진단과 고찰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아울러 정진석 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도 주제와는 상관성이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정진석 의원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오랜 측근으로 활동한 정석모 전의원의 자제다. 부친인 정전의원은 공주가 지역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너무 모진 짓 같아 완곡히 돌려서 묻고 싶다. 정진석 의원은 과연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 하더라도 공천만 받으면 거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자민련의 아성인 공주시와 연기군의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선친인 고 남평우 의원의 지역구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재선의원으로 도약한 한나라당의 남경필 전대변인에게도 해당한다. 한나라당에만 의문을 표시하면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나는 동일한 물음표를 선친인 정일형 박사의 지역구를 승계해 서울 중구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하고 있는 정대철 민주당 대표에게도 하나 보내드리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자질을 더욱 충실히 함양할 개연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대를 이어 금뱃지를 다는 부자세습 정치인들의 출현을 반드시 부정적 시각으로 재단할 일만은 아니다. 게다가 특정인의 자제라고 하여 특혜를 누리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누구의 자식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 또한 일종의 역차별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로부터 한 발 더 전향적으로 나아가 사고하는 것이 요구된다. 나는 IMF 관리체제가 가져온 최대의 폐해는 한국사회를 여타의 국가들과 비교하여 단연 역동적이고 활력 있게 만들었던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이 현저하게 저하된 점에 있다고 믿는다. 광풍에 가까운 고시열풍과 광기에 근접한 로또열기는 나날이 좁아지는 상위계층으로의 탈출구를 뚫고자 전국민이 내뿜는 단말마적 비명이라고 감히 단정하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부패와 후진성의 대명사로 지목되어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분야가 정치이지만 그나마 정치권은 혈족간의 상속과 친족간의 증여가 가장 드문 청정(?)구역이다. 아직까지는 정치가 실력으로 겨루고 능력으로 승부하는 자유로운 경쟁의 마당으로 남아 있는 사실에 우리는 작은 위안을 느껴야 한다. 경쟁력을 측정하는 잣대가 보스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설정되어 있고,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고유의 본분을 망각하고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겠다며 국회의원의 위상과 품격을 지방의원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정치인들의 그릇된 관점은 분명 시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쟁의 형태와 방식의 개선에 힘써야지 기존의 경쟁수단들이 낡고 소모적이라는 핑계로 경쟁 그 자체를 말살하려 해서는 안된다.

정치개혁에서 불가결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연결고리는 상향식 공천제의 도입이다. 상향식 공천의 취지와 기능은 일반시민들에게 정당의 문호를 개방해야 살아할 수 있다. 밀실에서 소수의 실력자들의 모여 앉아 지구당 의원장을 낙점하고 공직선거 출마자를 결정하는 풍토가 온존된다면 정치개혁에 관한 어떠한 논의와 논쟁도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동시에 정당체질의 개선은 당원들의 인적구성과 인식의 전환을 전제해야 한다. 식사시간만 되면 지구당 사무실에 어기적어기적 나타나 꾸역꾸역 설렁탕을 얻어먹는 당원들을 데리고서는 상향식 공천제를 실행해보아야 돼지의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격일 게다.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이 제도정치권에 대거 무혈입성하는 현상은 심각히 우려할만한 정치적 퇴영의 전조다. 일차적으로 이들의 출현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정치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선순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공주가 소규모 도시일망정 정진석 의원 이상의 역량과 경륜과 포부를 갖춘 신진인사-당연히 나는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는 어디에선가 존재할 터이다. 단지, 내가 누구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꿈과 비전을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야기되는 것은 기회의 균등에 어긋날 뿐더러 지역민들 사이에 정치적 좌절감과 무기력증만 유포시킬 뿐이다.

여기에 더해 2세 정치인들의 약진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정치적 비전의 실종과 타락을 불러온다. 박정희의 큰딸인 박근혜 의원에게서 우리는 유신의 추억과 의혹을 지우지 못한다. 김홍일 의원을 둘러싼 갖가지 잡음과 구설수는 그가 차라리 국회의원이 되지 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수월히 꿰어찬 남경필 의원이 거둔 성적표라고는 정당의 입노릇을 하는 대변인 구실을 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 그리고 환멸감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한 것이 고작이다. 총선이 임박하는 시기마다 어김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노재헌과 전재국의 대구와 합천 출마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완벽히 단죄하지 못한 대한민국이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할 저주스런 업보다.

엊그제 YS의 둘째 아들인 김현철씨가 거제를 지역구로 삼아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는 소식은 국민들에게 씁쓸함과 우울함만을 던져준다. 아버지의 정치를 업그레이드하겠다고 나선 그가 기껏 선택한 길은 아버지의 고향에 쪼르르 달려가 지역민을 상대로 하소연하는 몹쓸 방법이었다. 전임 대통령으로서 아버지가 남긴 부채와 자산에 대한 공과는 역사와 국민이 따져야 정상이다. 아버지의 국정파탄과 국가부도에 한 몫을 거든 아들이 주제넘게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작태는 국민정서는 물론 장기적인 국익에도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정치를 하겠다는 김현철씨의 의지는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 치러진 16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은 배경은 자의의 발로가 아니라 타의가 작용한 측면이 훨씬 강했다. 나로서는 그의 거제도 출마포기를 종용할 마땅한 루트도 경로도, 지렛대도 없다.

현철씨는 한나라당 공천을 희망한다고 한다. 전당대회를 거쳐 새로이 꾸려질 한나라당 지도부로서도 김현철씨의 공천신청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다. 거제도를 무공천 지역구로 남겨 실질적인 공천을 하는 것이 유력한 방안일 것이다.

나는 김현철씨가 거제도에 출마하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이 한마디만은 꼭 전해주고 싶다. 김현철씨는 아버지의 정치를 업그레이드하기 이전에 망국적인 지역구도에 업혀, 몰락한 아버지의 위세를 빌어 정치를 하려는 본인의 머릿속부터 업데이트 하기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주문할 것이 있다. 노정권은 현철씨와 관련하여 YS측으로부터 타전될 여하한 시그널에도 반응해서는 안된다. 호시우행의 자세로 거제도에 최강의 후보자를 물색해라. 그리고 현철씨의 제왕적 행태와는 확연히 대비되도록 거제도 레이스에 출전할 노무현팀의 선수는 지역주민들과 현지 당원들의 여론을 수렴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꼭 상향식으로 선출하라.

북쪽의 조선은 세습왕조를 구축했고, 남한의 또 다른 조선은 해가 지지 않는 세습적 언론왕국을 이땅에 구현했다. 대물림과 세습은 이제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판사의 아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의 아들이 검사가 되며, 회장님의 아들이 회장님이 되는 세상에서 정치까지 대물림과 세습의 대상이 된다면 이 나라는 정말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