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씨, 말 없이 ‘두문불출’…

전두환씨 ‘차남 괴자금 170억’ 알려지자 ‘곤혹’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은 이른바 ‘안풍’(安風:안기부 예산 전용의혹) 사건으로 인해 검찰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처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김영삼(왼쪽).전두환 전 대통령. 아래는 170억원 괴자금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전두환씨 차남 재용씨
한나라당 소속 강삼재 의원(경남 마산시 회원구)이 소위 ‘안풍’ 사건의 돈 출처로 거론한 YS는 일체 이에 대해 함구(緘口)로 일관하고 있다. YS는 강삼재 의원이 ‘안풍’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940억원은 1996년 당시 내가 사무총장으로 있던 신한국당 총재인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집무실에서 받았다”는 진술이 나온 뒤, 사실상 칩거하다시피 했다. 그동안 ‘YS 대변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부산 사하구을)은 이와 관련,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일절 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박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강 의원의 진술 이후 YS를 면담하고 나서 나온 것이어서 YS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측근들에게 ‘함구’를 지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 의원은 2월 8일 부산에서 열린 안상영(安相英) 시장 영결식 참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어제(7일) 오후 상도동을 찾아 김 전 대통령과 30여분 간 강 의원의 진술에 대해 보고도 하고 여러 가지 상황 등에 대해 말씀드렸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의원은 “지금은 일절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므로 말하지 않겠다”고만 했다. 그는 ‘법원이나 검찰의 소환요구시 YS가 응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 부분도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며 “그러나 언젠가는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당시 수사검사 “100% 안기부 예산”

당시 수사검사였던 박용석(朴用錫) 성남지청 차장검사는 2월 8일 “(신한국당으로 들어간 자금은) 100% 안기부 예산이 맞다”고 거듭 강조했다.

“계좌추적 결과 전액이 국고수표로 연결됐다. 국고수표는 예산집행 수단이다. 예산집행 관계자와 김기섭씨도 그렇게 얘기했다. 안기부 예산은 재경원에서 경상비로 안기부에 배당한 일반예산과 안기부 사업비 명목으로 책정된 재경원 예비비로 구성된다. 당시 그 자금은 모두 이 예산에서 나왔다.”

YS는 퇴임 이후 DJ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화법으로 비판해왔다. YS는 최근 들어서는 경남 거제에 출마하는 둘째아들 김현철(金賢哲)씨의 당선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결국 940억원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YS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검찰 주변에선 보고 있다. 940억원이 전액 안기부 예산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되면 그 돈을 받아 전달한 YS도 가담한 것이 돼 국고(國庫)를 전용한 혐의로 처벌받게 된다. 이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10년이어서 김 전 대통령은 형사처벌뿐만 아니라 추징금도 내야 한다. 반면 그 돈이 전액 ‘외부자금’이고 안기부 계좌를 통해 세탁된 뒤 국고수표로 인출돼 강 의원에게 전달됐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 돈이 모두 YS의 정치자금으로 확인될 경우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의 공소시효(3년)가 이미 지나 YS는 사법처리되지 않는다. 1992년 대선 당선축하금 등으로 밝혀질 경우엔 수뢰죄 등이 적용될 수 있어 어떤 형태로든 이 돈의 출처 규명을 위해서는 YS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많아지고 있다.

940억원 전액이 안기부 예산일 경우 한나라당은 ‘세풍 사건’에 이어 또다시 ‘세금을 선거자금으로 전용했다’는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만에 하나 1992년의 대선잔금일 경우 가뜩이나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오명을 쓴다는 부담이 따른다.

관심은 검찰이 YS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을 경우 YS가 응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재임 시절 두 전직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을 사법처리한 당사자로서 9년 만에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는 검찰 수사의 칼날을 YS는 과연 피할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이다.

검찰 “이규동씨 돈 아니다”

YS뿐만 아니라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역시 ‘검은돈’으로 다시 위기에 몰렸다. 검찰이 추적 중인 전씨의 차남 재용씨의 괴자금 170억원이 ‘전두환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10일 검찰의 세 번째 소환을 앞두고 있는 재용씨는 괴자금 170억원의 출처에 대해 “외할아버지 이규동씨로부터 물려받은 돈”이라며 ‘아버지와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검찰은 “이 돈이 이규동씨의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만약 재용씨의 괴자금 170억원이 ‘전두환 비자금’의 일부라면 전씨는 또다시 전직 대통령의 위상에 먹칠을 하면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재직시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을 숨겨놓고 자식들의 치부(致富)에 사용했다는 그간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번에 재용씨 괴자금을 추적하면서 재용씨가 괴자금 중 일부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신축 중인 10억원대 고급빌라 세 채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고, 일부는 유명 탤런트 P양과 P양의 어머니 계좌에 흘러들어간 사실도 파악했다.

검찰은 1995년 ‘전두환 비자금’을 수사하면서 전씨가 국내 기업체들로부터 2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이 중 1000억원대 자금을 수백 개의 가차명계좌에 분산예치하거나 무기명 채권 구입 등의 방법으로 은닉하고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하지만 전씨는 그동안 본인 명의로 된 자택과 가재도구가 모두 경매에 부쳐지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라”는 배짱을 보이며,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추징금 2204억원 중 1890여억원은 내지 않고 버텨왔다. 전씨는 작년 4월 법원에 나가 “가진 돈은 예금 29만원뿐”이라고 주장하다 “그러면 골프는 어떻게 치나” “1996년 추정재산 1600억원을 어디에 다 썼나”라는 젊은 판사의 힐난을 듣기도 했다.

만약 170억원의 괴자금이 전씨의 비자금으로 밝혀질 경우 앞으로 관심사는 당초 1000억원대로 추정되던 나머지 비자금을 찾아내 국고에 환수할 수 있느냐 여부. 그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전씨가 비자금을 제3자나 측근들에게 맡겨 치밀하게 보관해 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검찰은 이번 재용씨 수사를 계기로 “괴자금의 원출처가 어딘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만약 은닉됐던 ‘전두환 비자금’이 모두 추징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전씨가 지금처럼 당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정장열 주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