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아이다 호>는 길에서 시작해서 길에서 끝을 맺는다.

' 길 모양만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로 시작되는 마이크(리버 피닉스)의 첫대사는 '난 길의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 로 마감을 한다. 퍼시 애들론의 <바그다드 카페> 역시 사막의 길에서 시작되어, 자신의 새로운 삶의 길을 선택하는 자스민(마리안느 자게브레히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길은 인생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길 위에 던져져서, 선택의 길에서 방황하다, 결국 길에서 삶을 끝내는, 길은 희망이며 절망이고 서두이며 마무리이다. 그리고 길은 여행에 있어서도 시작이며 끝이다. 떠나는 자를 위하여 길은 있고 돌아오는 자를 위하여 길은 거기 있다.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남도의 길은 아름다웠다. 차유리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차 안의 씨디에서는 말로의 <섬진강>이 흐느적 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즈와 한영애와 양희은과 빗소리를 적당히 뒤섞어 노래를 만들면 바로 지금 차안의 음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주에서 합류한 27 번 국도는 좌우로 연두색 생명의 나무들과 소박한 논과 밭 그리고 집들을 펼쳐보이며 한 호흡의 운전을 시도 때도 없이 방해했다.

강진면 옥정리의 옥정호를 못가서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섬진 강변의 마을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젖어가는 여인의 강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애시당초무리였다. 감상은 마음으로나 담아가라는 듯, 맞은 편의 트럭 한 대가 상향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자의 관점으로 길을 가장 잘 만든 국가를 뽑으라면, 나는 독일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하여, 퓌센에서 끝나는 로만틱스트라세는 그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이다. 길의 양옆으로 너른 유채꽃밭과 정면으로 만년설의 알프스가 펼쳐주는 풍광이 가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길이라는 것의 상품성에 일찍 눈을 뜬 이친구들은, 괴테스타라세, 바흐 스트라세, 메르헨 스트라세등 대문호와 음악가, 동화작가의 괴적을 쫒아 길에 이름을 부여했다.

그러나 굳이 <우리 것 넘버원> 의 국수적 편견이 아니더라도 섬진강을 끼고 도는 길은 독일의 그것과 비교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길에 알프스는 없지만, 열입곱 수줍은 처녀의 앞가슴이거나 꽃무덤의 봄긋한 행렬과 같은 친근한 산들이 강과 밀어를 나누며 솟아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괴테와 바흐와 달리 동시대를 함께 살면서 섬진강을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네 번째 수다접선의 초대자, 김용택이다.

섬진강과 떼어서는 시도 사람도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시인이 김용택이다. 아울러 섬진강 역시 김용택을 떼어놓고는 웬지 허전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섬진강에게 있어 김용택은 강물이거나, 물아래를 흐르는 작은 돌이거나, 강변에 무심하게 서있는 작은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문학의 관점에서, 신동엽이 금강에 역사성을 부여했다면, 김용택은 섬진강에 육자배기 가락같은 남도의 서정성을 꽃잎으로 띄워 흘리고 있으니 김용택과 섬진강은 서로 주고 받은 공평한 관계일 수도 있겠다.

1948 년 임실에서 태어나, 1982 년 등단 후, 1985 년 <섬진강>이라는 첫 시집이후 지금까지 섬진강을 한 번도 등지지 않은 채, 천천히, 느릿느릿, 게으르게 살아가고 있으니, 개 대신 사람을 집어넣는다면 기형도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이라는 표현은 섬진강 시인에 대한 아주 적합한 삶의 묘사일지 모른다.

지금 시인은 자신의 모교이자 자신의 동무들이 다녔었고 지금은 그 손자들이 다니고 있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봄비가 내리고 있는 아담한 초등학교 교정은 "예쁘다" 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큼 입구로 향하는 아담한 동산부터, 운동장과 건물까지 구석구석 수채화 풍경으로 젖어있었다.

2 층으로 향한 계단으로 올라가 그중 한 교실을 들어서니, 일곱 송이의 들꽃들이 커다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자기들 만큼 예쁜 그림을 그리기에 한창이다. 그리고 거기 개량한복을 입은 나이든 소년 한 명이 아이들의 그림을 뒷짐을 진체 바라보기도 하고, 칠판에 동시를 적기도 하며, <수업>을 하고 있다.

기자는 시인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의 두어 시간 동안 진메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진메마을은 지금 이 교실의 창가에서도 어스름 모습을 볼 수 있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고, 시심을 일군, 시인의 마을이다.

'앉으나 서나, 마루에 누워서나 방에서 밥을 먹을 때나 문 밖만 내다 보면 강물이 보인다' 고 시인이 노래한 진메마을을 맨 처음 맞이하는 것은 백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느티나무다. 섬진강 중상류에 위치한 이 마을은 뒤로는 긴 산이, 앞으로는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너른 강변에는 봄이면 자운영이 들불처럼 피어올라 더욱 아름다워지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 4 킬로 정도 오솔길을 가다보면 내 천(川)자에 못 담(潭)자, 천담마을이 나오고 천담마을에 못미쳐 시인이 한 때 교사로 재직했던, 그러나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린 천담분교를 만날 수 있다.

큰 비가 오고 / 큰 붉덩물이 쿵 쿵 쿵 흐릅니다 / 다리가, 횟다리가 넘어 / 학교에 못 가고 / 우리는 이 쪽에서 / 선생님은 강 저쪽에서 / 손 모아 몇번씩 불러 보다가 / 쭈그리고 앉아 / 물 구경하다 / 오늘은 그냥 집에 가는 천담 분교
<천담분교 전문>

가을이면 곶감으로 유명한 천담마을을 3 킬로 더 가면 구담마을을 만날 수 있는데 길도 집도 마을도 모두 마치 여행자를 위해 꾸며진 모형의 마을처럼 생겨서, 시인이 말한대로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칭찬이 별로 틀린 말은 아닌 듯 느껴진다.

쉬엄 쉬엄 사진도 찍고, 강가의 백로도 구경하며, 이끼낀 마을의 돌담을 걷다보니 어느 덧두어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버려 급히 학교로 돌아와 시인을 마주한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 더 텅 비어 버린 학교에는 봄비가 더 거세게 내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