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타임즈

홈 > 사람들

나의 영화 이야기

어린시절 영화의 편린들

2004년 07월 22일 (목) 00:00:00

이상철

leesshr@daum.net

나와같은 연배들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인 기억이겠지만 발밑에 쥐라도 다닐듯 컴컴한 극장 내부의 후텁지근한 냄새, 몇가지 주점부리를 목에 걸고 관객들 사이를 오고가는 판매원들, 국가연주와 함께 어수선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포즈. 대한 늬우스... 그리고 그 홍수같은 눈물...(나를 데리고 다닌 어머니, 삼촌들, 숙모들은 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의 애호가들 이였다) 그들의 눈물을 훔쳐보면서 나 또한 얼마나 까닭없는 눈물을 훔쳐야 했던가.

그러다가 나의 독자적인 감각이 어슴프레 하게 나마 눈을 뜨게한 최초의 영화로는 흑인 권투선수와 백인 여성의 사랑을 다룬 실화 영화 '복서'이다.
그 금기의 사랑은 철저한 비극으로 치달아 인간성까지 파탄에 이르는 지경으로 막을 내린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것은 우아했던 귀부인이 몰골이 엉망이 된채로 할렘의 더러운 뒷골목을 배회하다 목이 부러진채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던 장면이다.

그녀를 껴안고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남자의 비통이 사춘기로 막 접어들던 내 가슴에 처연한 그림으로 남아있다. 여자를 잃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막다른 곳에 치달은 그는 다시 성난사자처럼 과거의 영광을 탈환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어밀지만 영화의 엔딩은 참담한 그의 패배와 함께 막을 내린다. 자포자기끝에 다시 털고 일어섰지만 정신력만으로 극복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정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봐왔던 익숙한 엔딩이 아니었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을 보장하는 영화들에서는 어느 한계이상의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캐롤리드'의 ' 제 3의 사나이'며 시인이기도 한 '장 꼭도'의 ' '올훼' ' 미녀와 야수' '줄리앙 뒤비비에'의 ' 무도회의 수첩', '나의 청춘 마리안느' 등은 커서 일부러 본 영화지만 그런 류의 로맨티시즘 영화는 아무리 명화라고는 하나 내 마음에 그다지 공명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평가와 내안의 자기력과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셈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 사운드 오브 뮤직'이 아무리 명화라고 해도 '르네 끌레망'의 '태양은 가득히' 같은 영상의 압도적인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일 뿐이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명화중의 명화들 가운데 내 공감을 깊이 자아내는 작품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페데리코 페리니'의 '길'에서 본 '안소니 퀸'의 연기와 그 한편에만 출연한 여배우 '줄리엣타 마시나'의 연기는 참으로 잊을 수가 없고 '잉게마르 베르히만'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흠잡을데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과 소외의 문제를 그 감독만큼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을 그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구의 싸늘하고 신비스러운 영상속에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그의 명작들은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내 아이와 처음으로 영화적인 언어가 소통된 작품도 그의 '화니와 알렉산더' 였다. 7살밖에 안된 아이의 감수성에 감탄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후 아이는 '히치콕'의 영화에 빠졌고 어쩔 수 없어서 나도 히치콕의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 그리고 '아빠는 출장중'(85)으로 칸 영화제 그랑쁘리를 탔던 세르비아 (구 유고 )감독 '에밀 쿠스트리챠'.......'페데리코 페리니'의 계보를 잇는 듯한 두번째 작품인 '짚시의 시간'(88) 만한 명작을 다시 또 볼 수 있을 지 궁금하다.

현대 영화사를 빛내는 명 감독, 명화들을 헤아리자면 한이 없겠지만 과거를 통털어 내 뇌리에 잠겨오는 감독들은 이 세사람 뿐이다.
'프란시스 코폴라'나 '베르톨루치'의 영화들이 지닌 매력은 그들 이후의 또다른 색깔이다. 그들 이후 영화는 바야흐로 폭포처럼 분깃점을 이루며 여러갈래로 뻗어나간다. 하지만 결국 압축하자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다각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시각이 감독과 시대의 환경에 따라 무척이나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지만 '울리 에델'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89)에 다다르면 마치 하나의 정점을 보는 듯 하다.

'울리 에델'이라는 낯선 이름의 감독이 지닌 통찰력과 역량은 최근 들어 한국 영화에서 보여지는 몇몇 젊은 감독들의 신선함과 비견될 만하다. 당시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 영화는 네모난 사각의 울타리안에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다고 용트림을 하기 시작한다.

예술 보편의 움직임,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은 영화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각종의 실험과 파괴가 영상예술의 한계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과 가장 가까이서 호흡하는 예술 장르인 만큼 여전히 대중적인 언어에서 멀지 않은 작품들이 상영관을 독점하고는 있지만 일탈한 영화 이야기들이 우리의 호기심 어린 눈과 귀를 매혹적으로 붙들고 있다. 말하자면 두 극단의 공존이라고나 할까.

90년대 초반 우연한 기회에 나는 많은 영화 필름을 소장하고 계신 분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질 수있어서 충무로의 지하상가를 발이 부르트게 쫒아다녀도 얻기 힘든 수다한 필름들은 얻어 볼 수 있는 감사한 경험을 하였다.
그분으로부터 나는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금지된 영화들, 소련, 동구권, 이탈리아 등지의 색다른 필름들을 얻어 볼 수 있었다. 이른바 '컬트영화'로 분류된 필름들이다. 그러나 사실이지 분류라는 것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익숙한 영화와 익숙하지 않은 영화라는 이름으로 포괄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기괴한 영화가 다 컬트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이지 상식을 뒤엎는 반 영화적인 작품들은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항상 있었다. 우리의 과거사가 그런 다양성을 접할 기회를 철저하게 차단한 탓이지 최근에 보여지는 그 모든것들이 갑자기 등장된 것은 아니다.

'에이젠 슈타인'의 영화 ' 전함 포템킨'을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영화로 분류하던 단절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로서는 느닷없이 던져지는 낯선 필름들에 대해 관대해 질 수가 없다. 문화적 풍토의 지반이 아직은 너무 약한 것이다.
비판을 하고 싶어도 비판에 필요한 자료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영화의 신선함은 차라리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역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땅이 박할 수록 꽃은 아름다운 법인가.

'제의' 혹은 '숭배'라는 뜻을 지닌 '컬트' 라는 단어가 영화용어로 둔갑된 것은 60년대부터 대중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해 지하실이나 전용 소극장 등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괴상한 필름들이 차츰 대중의 시선을 끌면서 일반화되어 가던 75년 경이었다. 그 계기가 된 필름이 75년판 ' 록키 호러 픽쳐 쇼' 로 알고 있다.
컬트의 대표적인 작품을 들라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 엘 토포' '성산' 등을 만든 멕시코 출신의 '조도로브스키'이다. 그의 영화 '산타 상그레'를 함께 보던 내 친구는 구토 때문에 밖으로 뛰쳐나갔었다.
화면을 도배하는 낭자한 선혈이 최근 영화만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영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육을 먹는 영화인 ' 장 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의 합작품인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감상할때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풍자영화라는 상식을 안고 본 탓인지느 모르지만.

'코엔' 형제의 지적 재기가 돋보이는 '바톤 핑크' 라든가 조직체의 위선에 대한 냉소를 담아낸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도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 팀 로빈스'의 인상적인 연기와 ' 알트만' 감독의 비판정신과 영화적 양심에 동참하기 위해 우정출연한 배우들로 인해 꽤나 볼만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이후 배우들의 무조건적인 '알트만' 감독에 대한 숭배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들을 엮어서 만든 영화 '숏컷' 을 통해 다시한번 과시된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괴상함과 기괴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이라면 이탈리아 출신의 괴팍한 감독 ' 파졸리니' 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보다 더 뒤틀린 기이한 생애를 살았던 감독의 이력 만큼이나 영화역시 세계와의 소통 불화를 특이한 화법으로 풀어 놓고 있다. 언제 기회가 닿는다면 좀더 소상히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외디푸스적인 갈등과 분열, 파시즘에 대한 새디즘적인 가학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 이 영화는 아마도 영영 대중앞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듯하다. 드러낸다 해도 사실 달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영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숨겨진 마성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 이탈리아 영화들은 대체로 상당히 개성이 강하고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영화들을 좋아한다.)
컬트 영화의 계보를 논할때 프랑스 출신의 '브뉘엘'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16분 짜리 필름인 ' 안달루시아의 개' 의 첫 장면.
달 한복판을 어둡고 길게 스쳐가는 그림자.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된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한쪽 눈을 벌린다. 그리고 면도칼에 의해 여자의 눈동자가 가로로 잘리는데 거기에 피 대신 커다란 눈물 방울이 맺힌다..........첫 장면부터 얼어붙게 만들던 이 초현실주의 영화를 필두로 해서 ' 부뉘엘'의 영화들은 뒤틀린 성에 대한 난해한 영상을 유감없이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세브린' 도 브루주아에 대한 그의 신랄한 야유와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공간에 따라 허물어져 내리는 충격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영화적 언어로 가장 잘 그려낸 감독으로 기억되는 화가 출신의 감독 ' 피터 그리너 웨이' 그의 작품들 중 '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의 정부' 는 놀랍게도 국내에서도 상영이 된적이 있다.
참으로 특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구성과 스토리와 대사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화가 출신 감독 다운 놀라운 색체감과 희화적인 인물들에 대한 풍자의 재미때문이 아닌가 싶다. 악동 기질이 다분하고 재기발랄함이 넘쳐서 사뭇 매력이 느껴지는 이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왜 그를 향해 ' 온갖 재주를 합쳐놓은 천재' 라는 찬사가 붙여졌는지 납득이 된다.

최근들어 영상은 더이상 영상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영상 스스로 하나의 소우주가 되려하고 있다.
모든것을 끌어들여 팽창일로를 걷다가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버린 양상이다. 컬트 영화까지 언급했지만 대부분이 9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영화와 제 3국 영화들의 독특한 화법들은 여전히 우리를 들뜨게 하고 끊임없는 애정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한다.
경이의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던 중국영화, 인도영화, 이란 영화들...하지만 이후 한국영화의 수직적인 발전은 이 모든 영화를 뛰어넘는 눈부심이 있다. 기회가 되면 동양권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물결을 따라 숨가쁘게 일탈로 나아가는 영화들을 호기심반 지적 욕구 반해서 기웃거리기는 했으나 리얼리즘과 환상적리얼리즘의 중간지점( ? )에 서있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일탈에 대한 대리만족을 위해 영화를 본다는 말은 여전히 내경우 거부반응이 온다. 어떤 형식에 속해 있든 그속에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는 인간 본연의 색체감이라는 것은 마음을 잡아 끌기 마련이다.

어떤식으로든 삶의 절실함이라든가 쓰라림은 그 우수의 빛깔을 침잠시킨채 자력을 발한다. 나는 그 느낌을 만지고 싶어서 영화를 본다. 그 느낌이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귀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과연 그런지는 확신이 안서지만 사람을 알아가는 또하나의 방법이라는 막연함도 한몫을 거들고 있다.

이상철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