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잠재적 시장의 절반에 불과한 남성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나머지 절반의 시장은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에 있어 역동적인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소비자 심리와 직원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이해하는 여성 특유의 경영방식이 필요한 때다.”

여성 특유의 포용 리더십을 강조한 대표적 표현들이다. 최근엔 아예 재계 인사 키워드를 ‘WXY’로 압축하는 관계자들마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W는 여성(Women), X는 의외의 인물(X-man), Y는 젊은 인재(Youth)를 각각 의미한다.

하지만 최소한 현재까지는 ‘아니올시다’에 가깝다. 지난해 인사·경영 전문지 ‘에이치아르 인사이트’가 국내 100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임원 현황을 조사한 결과, 단 21개사만이 여성임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여성임원 비중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관성에 불과할 것 같다.

실제로 1990년 이후 공채 출신여성이 급증하면서 조만간 임원 승진구간에 접어들었고, 지난 23일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여성들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라야한다”고 말해 여성인력 육성의지를 강조한 바 있다. 연말 임원인사에서 여풍(女風)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

24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이후 해마다 여성 임원을 배출해 온 삼성그룹의 경우, 총 1천760여명의 임원 중 여성 임원은 34명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그 비중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그동안 그룹 내 공채 출신 여성 임원은 최인아 제일기획 부사장을 제외한 대부분이 외부 스카우트를 통해 이뤄진 만큼 대상자가 자체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삼성이 지난 1993년 이후 여성 직원 채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통상 임원의 경우 20년 이상 근무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갈수록 여성 임원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부장 4~5년차를 임원 승진 대상자로 본다면 약 200여명이 올 연말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귀띔.

LG그룹의 경우 전체 임원 770여명 중 여성 임원은 14명 수준이다. 여성 임원 비중은 삼성그룹과 별 차이가 없지만 다소 보수적인 색채의 그룹 특성상 당분간 많은 여성임원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LG그룹 관계자는 “여성 임원 운운하는 것 자체가 차별일 수 있다”면서 “채용과 승진에 있어 남녀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SK그룹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여성 임원이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SK그룹은 약 600여명의 임원 중 8명이 여성임원이다.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룹 내 인식 변화 및 여성 직원 숫자가 늘어나고 있어 여성 임원 배출은 점차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SK그룹 관계자는 “대졸 여성직원의 채용이 예전보다 많아지고 있어 여성 임원 배출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라며 “여성 임원에 대한 인식도 과거와는 다르게 변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의 경우 전체 111명의 임원 중 5명이 여성 임원이다. 여성 임원 비율이 낮은 것은 평균 23년 정도 근무를 해야 승진대상에 포함되는 특성상 남성에 비해 인력 풀이 적기 때문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우먼파워는 시대의 흐름이긴 하지만, 임원 승진은 경쟁 속에서 능력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일 뿐,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롯데그룹의 여성 임원은 1명으로 비슷한 사업구조를 갖고 있는 타 그룹에 비해 숫자가 적지만 ´여성에게 임원 기회를 제공하라´는 신격호 회장의 지시가 있었던 만큼 향후 가시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격호 회장이 여성에게 임원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라고 얘기한 상태”라며 “롯데의 여성 직원 비중이 2004년 5%대에서 현재 30% 정도로 커진 것처럼 여성 임원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그룹도 여성 임원수가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 총 170명의 임원 중 여성임원은 6명이다. 모두 대한항공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조현아 전무 조현민 상무가 포함돼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여성 직원(임원 아님)이 많은 직종이니 만큼 회사 측에서 여직원들에 대한 혜택을 늘리고 있고 여직원들의 진급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금녀의 벽을 뚫고 여성 임원 탄생 자체가 화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기업의 사업 구조상 남성적 특성이 강한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이 그 대상으로 각각 1명의 여성 임원이 근무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글로벌 리더십 센터장’으로 전격 영입된 오인경 상무가 사상 ‘첫 여성 임원’이다. 당시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임직원들의 글로벌화와 리더십교육 등을 위해 글로벌리더십센터를 신설하고 이를 총책임질 인력을 외부에서 찾았다. 포스코는 지난 2005년 3% 수준이었던 대졸 여성 인력 비중이 최근 5년간(2005~2010) 지속적인 채용을 통해 8%이상으로 증가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최근에는 연평균 대졸 채용 인원 중 17% 정도가 여성 신입사원으로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성 인력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이 요구되는 만큼 채용을 더욱 확대할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지난 6월에는 포스코에서 첫 여성 ´그룹리더´도 탄생했다. 현재 포스코에는 포항제철소 2명, 광양제철소 2명, 서울사무소 9명 등 총 13명이 여성 팀리더가 근무하고 있다.

수만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현대차그룹 역시 영업파트에 단 1명의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그것도 지난 2009년 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첫 번째 여성 임원(이사대우)이 나오면서 가능했다. 주인공은 김화자 국내영업본부 충북지역본부장으로 지난 1987년 현대차에 입사한 이래 24년간을 영업 분야에서 몸담았던 ‘영업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