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똑~ 따닥’하고 술병 따는 소리가 난다. 앞치마 호주머니에 넣어 둔 손전화기의 문자 알림 음이다. 흙 묻은 손을 털고 여니 설악산으로 산행 간 남편이다. 토왕성 폭포를 찍은 사진인데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 걸 봐서 내 속이 많이 꼬여 있는 게다. 오두막을 헐고 작은 집 하나 짓는 과정에서 잔손이며 큰손이며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랄 판인데 남편의 무관심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집안일에는 무관심하고 휴일 근무나 개인의 취미에 성공하는 남편을 바라보노라면 시큰둥해진다.

손은 늘 흙투성이고 걱정과 계획에 휘청거리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매사를 가볍게 밀어 내고 사는 성향이다. 그에 비해 나는 비릿한 어머니 품을 껴안고 그 모체로부터 이따금 열어둔 창틈으로 스멀거리듯 들어오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받는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각기 다른 성향을 지졌으니 아프고 힘든 쪽은 늘 내 쪽이다. 텃밭 일구어 고추며 상추 심어 물주고 이랑 만드는 게 낙인데 비해 남편은 흙을 싫어한다. 텔레비전 속으로 곧 들어가 버릴 듯 재미있어 하는 남편의 등을 보면 이 부분만큼은 절대 서로가 맞출 수 없겠구나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족이란 막힘없이 잘 통하는 게 기장 이상적이겠지만 몸의 혈관처럼 서로 뻗어만 있을 뿐이지 역할과 이상까지 같을 수 없다. 막 채취한 상추쌈을 같은 밥상에서 같은 자세로 먹으면서도 마트에서 사다 먹지 왜 이 고생을 하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눈앞에 있지도 않는 삼겹살을 찾기도 한다. 기차의 레일처럼 같은 방향으로 함께 달리면서 서로를 염두에 두면서도 개체가 달라져 있다. 어느 쪽이든 딱히 꼬집어 잘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내가 남편의 시선에는 안 해도 될 일과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런 소소한 감정들이 쌓여 더러 폭발을 일으켜 버럭 버럭 화를 내니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어 슬그머니 피해 버리는 남편의 등에서 나는 체념을 배웠다. 뭔가 구체적인 편이고 섬세한 나와 함께 사는 일이란 남편도 수월하진 않을게다.

이왕 설악산까지 간 사람이니 아무 말은 안했지만 속내는 서운했으니 내 마음 자리의 폭은 좁디좁은 사람인가. 누구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보게 마련이지만 남편은 그게 더 심한 사람이다. 잘못에 지적을 하면 발끈하고 저항할 때를 생각하면 각자를 인정하든 안하든 침묵하는 게 상책이다. 산에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나무만 보는 게 아니다. 풍광이나 사찰의 독경소리에 걸음을 더 조심스레 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새소리나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 가슴이 후련함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산길에서 얼핏 떠오르는 영상으로 사색할 수 있는 호젓한 길이 좋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리하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 다른 보폭과 시선이라 하더라도 보편타당성에서 크게 비켜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게 대중적 잣대다.

언제부턴가 사회는 제각각 개인 문화를 지향하는 분위기다. 혼자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워 그 쓸쓸함에 부르르 엄살을 떨 필요도 없다. 이름 하여 빈 둥지 증후군의 서막이다. 손톱에 흙을 끼고 사는 여자가 앞치마를 스치는 여린 바람의 존재를 미세하게 느낀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랜데 아직도 부재중인 이 사람에게 그러려니 하면서도 마음은 서럽다. 포기 포기는 배추나 셀 때 쓰는 단어지만 나는 수시로 포기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산이든 들이든 마음껏 다녀서 건강이라도 지켜진다면 그것만큼은 진정 축복해 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