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 집 사립문을 밀친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작년 이맘 때 하루를 머물며 주인과 정을 들인 사소한 기억들이 새롭다. 자갈속의 이끼가 산마루에 걸린 석양을 받아 빛을 발한다.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아산 송악면에 위치한 사슴농장의 통나무집이다. 황토방에 여정을 풀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마당 저편의 천막 아래서 훈제구이를 하던 주인과 반가운 악수로 모처럼 상봉한 남매마냥 웃는다. 하늘 끝이 닿을 듯 신록 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의 울부짖음과 하얀 찔레꽃의 흐드러짐이 정겹다. 긴 뿔을 머리에 인 사슴과 눈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선한 자기의 눈동자를 닮지 않은 인간에게 금시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문화가 차단된 산속의 정서가 마냥 좋다.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하며 그것이 주는 해방감에 시름을 잊을 수 있다. 배드민턴을 들고 그늘이 내리는 마당으로 간다. 언제나 공을 강하게 쳐서 맞받아치지 못하도록 곤경에 빠트리는 짓궂은 남편과 마주 선다. 기(氣)싸움을 단단히 하고 받아쳤지만 여지없이 졌다. 백기를 들면서 키 높이와 간격을 좀 맞추어 주지 그랬냐고 게임에 진 것을 투정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툇마루에 몸을 뉘니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일행 중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아눕는다. 침울한 표정의 여인에게서 뭔가 힘들어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숲길을 좀 걷자는 내 제안에 선뜻 따라 나선다.
  “언니 속상해 죽겠어요.”
  “왜 그래요?”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언니라고 부르는 법 없이 늘 사무적이던 여인이 날 더러 불쑥 언니라고 부른 건 의외였다. 사람과의 거리를 자로 재는 듯 불편을 끼고 사는 여인이다. 부족한 것 없이 쇼핑과 운동이 하루 일과인 사람이 목소리가 몹시 무겁다. 친구와 갈등이 생겨 속을 태운다며 울먹인다. 평소에 대인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걸 더러 봐 왔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긴 공백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존심 버리고 화해를 청해서 좋은 관계로 다시 회복하라고 일러준다. 그렁거리는 눈자위에 마음이 저려서 손수건을 건넜더니 눈물과 서러움을 함께 닦는다. 울던 여인의 코 밑이 빨갛다. 새 손수건이라 부드럽지 못해서 피부가 자극을 받았던 게다. 

터놓고 일상을 나눌 친구 하나 없다고 외로워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말 나온 김에 인간관계에 대하여 문제를 짚어 보자는 말이 하고 싶었다. 지나치게 직설적인 언어 사용이 평소에 거슬리더라는 말도 해 주고 싶었지만 입 안에서만 뱅뱅 돌 뿐 차마 하지 못했다. 진실한 우정을 두지 못한 이유를 본인에게서 찾아보라 하고 싶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 꾹 참았다. 나도 이 여인보다 나을 게 없다는 자괴감이 불쑥 말을 가로 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가 알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충고 하는데도 당연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꼭 타인이 지적해 주지 않아도 자기의 잘못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다 인지하고 산다는 것이다. 다만 고치고 다듬는 과정이 소홀해서 습관적으로 살 뿐이다.
  침묵하며 걷다가 커피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300원을 넣으니 정직하게 내려 받기해 주는 자판기의 차 한 잔을 내밀며 나는 끝내 자판기만큼도 솔직할 수 없는 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 평소에 느꼈던 말을 끝내 하지 못난 나는 어쩌면 새 손수건에 불과했다.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쉽게 희생 시키지 않은 나나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고 도도한 이 여인이나 다 길이 잘 든 부드러운 손수건이라 할 수 없다. 솔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대한 인간관계는 빳빳한 새 손수건 밖에 못 된다. 좋은 관계란 새 손수건처럼 빳빳한 게 아니고 적당히 낡아서 부드러워진 사이다. 

세면대에 분홍색 손수건을 담근다. 자기 몸 색깔보다 더 진한 붉은 빛을 토해 내더니 그제야 풀기가 죽는다. 빳빳했던 손수건이 부드럽게 변하듯이 내 가슴은 얼 만큼 단련을 시켜야 부드러운 언어를 쏟아낼 수 있을 지 내 입술연지도 함께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