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빌려 준다면                                                                                                               서 용 태 모임이 있는 날이다. 어떤 법칙을 정한 것도 아니건만 으레 술판 뒤에는 노래방으로 간다. 노래는 약간의 취기가 있을 때 잘 불러진다. 술의 힘을 빌려 숫기가 발동되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 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쓰겠다는 그런 가요였다. 부부가 마주보며 얼마나 열창을 하던지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고 있었다. 사실 친구 부부의 노래 솜씨도 솜씨지만 그 가사가 낭만적인 듯하면서 애절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작사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몇 시간을 그렇게 놀다가 집에 오면 잠시 동안 공허함이 엄습한다. 현란한 불빛, 요란한 음향, 세상의 풍상을 모두 토해내듯 질러대는 소리소리. 내 몸에서 여흥이 채 가시지 않았음을 느낀다. 멍한 상태로 그 가사를 흥얼거려 본다. 아무리 되뇌어 봐도 사랑보다는 후회를 노래한 것 같다.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가고 없는 임이거나 몹쓸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임을 두고 부른 자탄(自歎)일 것이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흔히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면서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우리 후회 없이 살자’는 말이다. 그런데도 지나고 나면 후회투성이다. 이 노래 가사처럼 아낌없이 사랑하지 못한 일로 가슴 아파한다.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정성은 내리사랑이라는 속죄의 길이 주어져 있다.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인가. 부부간의 사랑은 입에 담기조차 꺼려하는 사회분위기다. 팔불출, 얼간이로 취급받기 싫어하는 심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왜 진심을 숨겨두고 평생을 보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배우자와 사별할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사랑해야 할 상대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친구한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새롭게 떠오른다. 수 년 전에 어머니를 먼저 보낸 친구의 이야기다. 그 친구 아버지는 평소 과묵한 탓인지는 몰라도 자기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안고 울부짖더니 그만 실어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냉대하던 아버지가 미웠지만 너무도 속 깊은 사랑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에 원망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 뒤에 친구 아버지가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왜 그러셨는지를 물었더니 평생 동안 네 어미한테 ‘사랑한단 말 한 마디 들려주지 못한 후회’에 복받쳐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같이 들려주었다. 어느새 아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물끄러미 잠든 모습을 내려다본다.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하고 살았을까. 별일도 아닌 것을 두고 아내가 조금 잘못해도 크게 화를 낸 적이 많다. 이것저것 충고를 하면 못마땅하게 받아들인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 큰 소리도 치면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남자 같았으면 한잔 술에 스트레스를 날려 보겠지만 지어미인 까닭에 인고의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앓이가 되었나 보다. 큰 아이 결혼 날자가 결정되던 날 잠시 눈시울을 적시던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바로 분가를 하게 되어 그러나 싶었다. 아들이 결혼한다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멋쩍게 웃는다. 그 눈물의 의미는 단순해 보이질 않는다. 태중에서부터 자식을 기른 어미가 아닌가.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는지 모르겠다. 그저 행복한 눈물이었으면 좋겠다. 원앙처럼 산다 한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면 속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부부간이다. 지금 사랑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노래 가사일 수밖에 없다. 천년을 빌려달라고 하늘에 애원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는 사랑을 하며 사는 거다.  ●약력● *수필가, 둔덕 출생 *거제시 주민생활국장 역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덧셈과 뺄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