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김 정 아 hjlo906@naver.com 비가 내린다. 목말라하던 풀과 나무들은 이 비가 얼마나 반가울까. 하지만 난 걱정스러웠다. 해는 꼬리를 감췄고 약속장소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운전해야 한다. 출발시간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식탁위의 음식들은 식어 가는데 아이는 오지 않는다. 얼굴을 보자마자 나가야할 상황이다. 오늘따라 아이의 귀가가 늦어진다. 시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이제 막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내가 늦게 가기를 바랐다. 혼자 밥을 먹어야하는 아이가 마음에 걸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모임에 함께 가자는 그녀의 전화다. 모임에 갈지 말지 고민이라더니 마음을 정한 모양이다. 주차장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은 혼자만 비를 맞은 듯 가라앉아 있다. 비가 계속 내린다. 앞에 줄선 차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차선을 바꿔야 할까. 너무 늦게 출발했고 되도록 빨리 도착해야 한다. 앞차의 불빛이 비속에 멈춰 있다. 움직이는 와이퍼는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힘겹게 닦고 있다. 낡은 와이퍼가 제대로 빗물을 닦아내지 못한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의자 깊숙이 온 몸을 맡긴 채 조급한 나와는 달리 늦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긋하게 밖을 보고 있다. 빗속에 우산을 쓴 몇 명의 사람들이 보인다. 레커차가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고 찌그러진 자동차는 그대로 길 위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뒤차가 앞차의 뒤 범퍼를 받았나 보다. 앞차의 뒤 범퍼가 깨져 있고 뒤차의 보닛이 살짝 찌그러져 올라가 있다. 주위는 어두워져가고 자동차의 라이트는 밝아진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라디오의 음악과 섞인다. 벚나무는 비에 젖은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은 먹구름처럼 흐르는 빗물 위를 떠간다. 연분홍 꽃잎들이 흐른다. 꽃들은 질 때마저도 아름답다. 와이퍼는 삐거덕거리며 힘겹게 빗물을 훔쳤다. 하지만 닦이지 않은 빗물이 더욱 어른거리며 시야를 가렸다. 그녀의 시선은 연분홍빛 꽃잎에 멈춰 있다. 그러더니 몸을 곧추세웠다. 무슨 말을 하려나 나도 모르게 온 신경이 그녀에게 향한다. 그녀는 이해받지 못한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상처란 것이 일방적으로 받기만하는 것은 아닐 텐데. 교통사고가 나면 받은 차도 받힌 차도 멀쩡하지 않다. 자신의 상처가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힘들 때 좀 받아주고 위로해 주면 안 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비가 내리려하고 있다. 원망과 화가 뒤섞여 그렁거린다. 내 마음은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운전대만 꽉 쥐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말에 공감 이상이기를 바라고 있다. 자기의 편이 되어서 같이 미워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나는 버티고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원하는 그녀가 부담스럽다. 풀과 나무들이 이 비를 피할 수 없듯이 그녀와 나는 이 차 속의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불편한 감정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난 내가 나이가 많지 않다고 했다. 뜬금없이 나이라니. 소통의 문제에 나이라니. 내가 말을 해 놓고도 뭔가 맞지 않는 듯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도 이해심이나 배려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타인에게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노라고 애써 생각한다. 난 그녀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변명만 늘어놓고 있었다. 이미 낡아버린 와이퍼처럼 그녀의 마음을 깨끗이 닦아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자책은 내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와이퍼처럼 자신을 닳게 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버겁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잎이 눈처럼 날린다. 나무는 무거워진 꽃잎을 떨어뜨리고 새로운 열매를 키우겠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하나의 점이 되어 길게 늘어진 자동차의 긴 선위에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비가 왔고 사고가 났고, 꽃잎이 아름답게 졌기 때문이라고 하면 변명이 될까. 이렇게 우리는 늦고 있었다. 마침내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고차량은 레커차에 끌려 멀어진다. 차들은 잠깐의 정체가 있었을 뿐 별 일 아니라는 듯 서로를 배려하며 나아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완벽함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장을 고친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다독인다. 어느덧 목적지가 보인다.   ● 약력 ● 전북 임실 출생, 수필가 전북대학교 통계학과 졸업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