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새소리로 아침을 연다. 막 동이 튼 마당을 거닐다가 유순한 바람결에 묻어오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따라가 봤다. 잔디 속 여치다. 풀색으로 몸을 위장한 녀석이 가늘고 긴 다리를 치켜세우고 들숨날숨 하는 게 예뻐서 휴대폰에 담는다. 지인이 주고 간 물 상추가 며칠 째 절구에 떠다니더니 어느 새 실뿌리를 길게 드리우며 번식이 시작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소리 없는 생존본능으로 충실한데 나는 힘들다고 엄살을 부렸다면 사치였다고 스스로를 채근한다.

어느 날 집짓기의 꿈 씨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며 싹을 틔웠다. 정서를 비켜 가 버린 건축에 대한 갈등이나 수개월 동안 잠적해 버린 인부를 기다려 받지도 않는 전화기를 얼마나 눌렀던가. 주변의 텃세와 결여된 배려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삶의 전환점에서 예상치 못했던 가슴앓이와 맞물려 수많은 밤을 하얗게 새워야 했다. 좋아서 짓기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집짓기란 삽으로 산더미를 옮기는 일이었고 갑과 을이 뒤 바뀐 관계가 지속 되었다.

전형적인 농부의 딸로 태어났기에 호강한 적은 당연히 없다. 남녀 선호 사상이 없었던 부모님의 의식 덕에 딸이라고 해서 시대적 불이익이라든가 구박을 받지도 않았다. 아무리 바쁜 농번기에도 책만 끼면 다른 잡다한 일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이게 내 유년에 누린 유일한 호사였다면 지나친 과장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지향적 삶을 살아온 셈이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른 내 느슨한 성향이 얼마나 어리석은 처사였는지를 일찍이 간파하지 못한 점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정리가 거의 된 집에서 손님들은 테라스가 멋지다며 기념 촬영하기 바쁘다. 정작 이런 공간 만들기 위해 페인트칠을 하던 내 수고로움이나 눈물 바람은 아는 사람만 안다. 삼면이 바다가 보이는 축복의 집이라는 후한 칭찬이 고맙기는 하지만 내 전생에 부모나 나라를 팔아먹지 않고서는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을 수 없다며 웃음으로 고생스러움을 대변한다. 뙤약볕이 마구 쏟아지던 날 마당일을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급하게 물을 마시다가 사래가 걸린 적이 있다. 명치끝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으로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순간 몸에 닿는 흙의 감촉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머잖아 흙 속으로 스밀 것에 불과한 게 육신이고 삶과 죽음의 차이도 종이처럼 얇은 것이라는 생각에 사래의 통증만큼이나 가슴이 먹먹했다.

산다는 건 더러 나무처럼 외롭다. 집에 돌멩이 하나조차도 땀과 눈물 바람이 묻어있어 함부로 발길질할 수 없다. 뜰 안의 작은 모퉁이에서 보일 듯 말듯 누군가의 그늘 속에서 핀 작은 꽃이 되지 못함이 서러운 건 아직도 여자이고 싶어서다. 활활 용솟음치는 분노로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쌓으며 눈시울이 매울수록 속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꽃게는 집게발 하나를 미리 자르지 않으면 서로의 몸을 집어 뜯어 몸 전체를 다 망가뜨린다. 착하다고 잘 산다는 건 인간의 오만이고 내 상처 조물주는 알거라며 멀쩡한 집게발을 밤마다 자르고 또 잘랐다. 돌아보면 쉽게 얻은 건 하나도 없는데 아직도 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게 무겁다. 뭔가 이루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것을 울컥울컥 각혈 같은 눈물로 뼈저리게 배웠다.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는 순간 막 전화벨이 울린다. 점심먹자는 지인의 목소리가 더없이 반갑다.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관계가 아니고 정말로 내 생각이 나서 억지로 시간을 낸 진정한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머리 손질할 수 없으니 두건을 써서 뽀글이 파마머리를 덮는다. 습관적으로 신은 고무신에 놀라 황급히 벗고 부츠를 신는다. 시골 생활일수록 옷도 분위기 있게 차려 입고 감자 하나를 내더라도 더 예쁜 그릇에 담아내야 하는데 과연 나는 어느 중심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