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채영

가을은 결혼시즌이고 동창회 시즌이다.

한 친구의 딸 결혼식장에서 4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의 얼굴을 본 순간, 세월의 무상함을, 삶의 언저리를 비껴간 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35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들을 보면서 우리들 청춘의 덧없음과 젊음의 무게가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또 한 번 느끼게 됐다. 게다가 나도 곧 딸을 시집보낼 처지여서 그런지 결혼식장 분위기가 어째 남의 일 같지 않아 자꾸만 뒤돌아 보이고 어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때가 되면 모두가 치러야 할 일들이지만 경조사를 다닐 때마다 순간순간 내 나이의 경계와 마음의 경계에서 한계를, 절망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게 된다.

엊그제 토요일은 졸업한지 35년 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거제지회 회원들을 필두로 아침 일찍 서울을 향해 출발한 관광버스는 부산과 창원을 돌아 10시간이 넘어서야 남양주에 도착했다. 해성고 23회 동창들이 진짜 35년 만에 서울에서 정기총회를 한다고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한양으로 출발한 것이다.

부산, 창원을 한 바퀴 돈 상경 행렬은 참으로 거창했다. 문어 20키로, 장어 20키로, 뱅어, 20키로, 거기다 과일이며 안주며 여러 가지 술까지 바라바리 실은 차에 동창생들의 함박웃음까지 실은 버스는 두 시간도 안 돼 만원이 돼 버렸다.

남자친구 셋이 안내원을 자청하고 출발한 완행버스는 친구들의 미소로 지나간 우리들의 꿈으로, 우정으로 내달았다. 다들 사는데 바빠서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친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 시간은 하얀 교복의 열여덟 가시내고 머스마들이었다.

세월이 비껴간 자리엔 어느덧 깊은 주름살 하나가 늘었다. 어떤 이는 사장이 되고, 어떤 이는 교장이 되고, 어떤 이는 공무원이 되고, 어떤 이는 엄마고 아버지들이 되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200여명의 동창생 중에는 먼저 이승을 떠난 친구도 있었고, 와병 중에 참석 못한 친구도 있었고, 아예 소식을 끊고 속세의 삶에 빠져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친구도 있었다. 지난 개교 60년 행사에서 봤던 친구들은 자주 얼굴을 보는 친구들이지만 이번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야말로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고 만난 친구들이어서 더 반갑고 눈물이 났다.

서울친구들이 준비한 섹소폰 연주에 모두가 7080 작은 음악회를 열었고, 생일인 친구의 축가도 불러주면서 가을밤은 모두들 친구라는 이름으로 동화되어갔다. 밤새워 꽃피운 이야기꽃과 한 잔의 술은 한 때 젊은 우리들의 초상이고 슬픔이기도 했다.

동창이란 언제 어디서 만나도 가식이 없는 순수여야 한다. 오늘 내가 만난 친구들의 마음은 고교 동창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단짝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친구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해주는 친구들. 내 주변엔 아직도 이런 친구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경조사 잘 다니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까닭도 어쩌면 친구를 지키고 배려하는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잠시 만난 친구들이기에 헤어짐도 뜨겁다. 또 언제 다시 만날까. 기약은 없지만 희망은 품고 간다.

내 아름다운 청춘들, 세상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이래서 살맛이 나는 것이다. 끝까지 함께했던 오초들(다섯명의 술 좋아하는 친구들)은 버스에 내려 또 한잔을 외치며 떠났다. 붉은 단풍속으로...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고향을 지키며, 고향을 보듬은 채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잊었던 기억 속에서 그 많던 친구들의 꿈은 바람이었을까. 내려오는 길, 비도 바람도 몹시 서성거렸다.

그리고 버스안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7080의 까페로 우리를 인도했던 여자 친구들의 감미로 왔던 음률이 오늘처럼 늦은 밤 귓가에 맴도는 것은, 아직 내 청춘에 고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까닭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