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진 부엽토가 아니라도 좋다. 잔뿌리 몇 가닥만 내릴 수 있으면 군소리 없이 자기가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며 영토를 넓힌다. 물 한 방울 품지 못하는 가파른 벽에서 타고 오르기만 했다가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는 자기 생태를 알고 줄기를 옆으로 뻗어서 수분을 모아 뿌리로 내려 보낸다. 가는 몸으로도 휘청거리지 않는 건 다른 물체나 돌담 아무 곳에나 닿기만 하면 착 달라붙어 사는 뻔뻔함 덕이다.

발그레한 빛의 연한 새순이 줄기의 성장을 키워 키를 한 뼘씩 늘린다. 미국의 단편 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외로움과는 달리 시골 담이나 지붕 하나쯤은 시나브로 다 덮도록 잎이 무성하다. 다른 식물은 왕따를 시켜 자기 주변에 함께 자라게 봐 주지 않는다. 화가 지망생인 여류화가 존시가 지독한 폐렴에 걸려 죽어갈 때 이웃의 늙은 화가가 밤새 비바람을 견디며 담벼락에 그린 한 잎으로 존시에게 희망을 줬으니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적합하다.

하지만 다른 물체를 휘감고 빌붙어 산다하여 소인배에 비유되며 비열한 식물로 대접 받는다. 자기 영토만 지키는 게 아니라 남의 집 담장이나 어떤 장애물도 비켜가는 법 없이 슬그머니 줄기를 뻗으며 타고 오른다. 뻔뻔스럽도록 낯가림이란 없다. 화려한 꽃을 지닌 몸도 아니니 자기를 과시할 능력을 가진 식물도 못한다. 대신 빈틈없이 일정한 간격의 잎으로 꽃을 대신하며 자기를 내 세운다. 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성이 있는 만큼 잎까지 감성이 둔하여 시시한 바람에도 끄떡 않는다. 다른 잎에 비해 단풍이 빠르고 겨울까지 늦도록 운치를 보여주니 정서면에서는 으뜸이다.

산다는 건 이야기 한 아름을 가슴에 품고 가는 짧은 여행 같은 것이다. 더러는 바람사이로 소리 없이 잎을 키우며 오르는 담쟁이의 뻔뻔함을 닮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자유분방에 진보적인 성향과 유연성을 동원시켜 홀로설 수 있도록 오르는 것에 강한 사람이고 싶다. 뚫을 수 없는 벽을 만나면 갈등을 증폭시켜 파괴해서라도 진실은 밝혀져야 할 일이다. 엉킨 혼란 속에서도 담쟁이처럼 꿋꿋하게 억압과 자유를 함께 공존하는 달관의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지켜 주지 않은 타인의 약속에 속아 찾아야할 권리와 포기해도 될 사소함의 사이를 넘나든다. 어두운 상념의 덩어리들이 녹아내리고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견뎌야하는 건 시간이다. 아무리 정의가 실종된 사회라 하더라도 담장이든 철조망이든 천방지축 타 오르는 담쟁이의 뻔뻔함을 사람이 흉내 내어선 안 된다. 자신 있게 던진 무기가 회전을 하면서 강하게 날아갔지만 목표물을 명중시키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자기가 맞아야 하는 부메랑의 법칙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