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인천에 입항한 세계적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의 '레인보우 워리어'호는 다음달 5일까지 한국에서 고래 공동조사, 오픈보트(배 공개), 고래보호 활동 등을 펼칠 예정이다. '무지개 전사'란 뜻의 레인보우 워리어호는 전세계를 다니며 환경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레인보우 워리어호가 국내에 머무는 동안 거제환경운동연합 윤미숙 정책실장의 항해일지를 통해 그린피스의 활동을 생생히 전한다.

▲ 3월 21일 저녁 5시, 고래모니터링 일행을 실은 레인보우 워리어호가 인천항을 출발했다.

[항해일지① 3월 22일] 긴장한 첫날밤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2005년 3월 21일 저녁 5시, 고래모니터링 일행을 실은 레인보우 워리어호는 인천항을 출발했다.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생명들을 위한 세상의 유일한 배를 맞고 보내느라 분주했던 팀들의 시원섭섭한 눈길을 뒤로하고 기적을 울리며 고래를 만나기 위해 긴 항해에 나선 것이다.

그동안 잠잠히 쉬거나 각자 개인 볼일을 보던 그린피스 선원들은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마법에 풀린 인형들처럼 작업복으로 변신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소 가녀린 느낌을 주던 아델도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밧줄을 새끼줄 감듯 척척 감아올리고, 무거운 쇠사슬도 자유자재로 개겨서 정리함에 넣는다. 힘이 장사들이다.

그린피스팀은 선장 니콜스를 포함하여 18명, 우리 팀은 영상기록팀과 조사팀을 합쳐서 8명. 배정된 숙소에 짐을 풀고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숙소는 조그만 방에 이층침대가 있어 한방에 네사람이 묵는다. 침대라기보다 침상은 비좁아서 덩치가 조금만 크면 돌아눕기가 곤란할 지경이다. 벌떡 일어났다가는 머리를 침상에 부딪히기 딱 적당하다. 벌써 부딪힌 사람도 있다.

식당에서 이루어진 첫 회의에서 우선 각자의 소개와 맡은 업무, 그리고 주의사항이 공지되었다. 그린피스팀은 누가 보아도 한눈에 캡틴다운 이미지를 가진 니콜스 선장을 중심으로 일·이등 항해사, 갑판원 2명, 호주출신의 예쁜 주방장 1명, 캠페이너 2명, 정보통신담당 1명, 자원봉사 및 엔지니어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 선원들은 일반선원이 아니라 모두가 그린피스 활동가이다. 이들의 출생지는 각각 호주, 영국, 캐나다, 미국, 스웨덴, 인도, 스페인, 콜롬비아, 피지로 이 배는 다국적 인종들이 타고 있으나 통용어는 영어다.

레인보우 워리어호의 안전담당인 오스카가 몇가지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일러준다. 돛이 있는 배인 만큼 여기저기 늘어진 로프와 줄을 조심할 것, 특히 물을 아껴쓸 것, 모든 쓰레기는 재활용 할 것, 화장실과 샤워실은 오전과 오후 9시 이전에만 사용할 것, 냉장고의 음료수는 체크하고 돈을 내고 먹을 것…. 아침 7시 기상, 식사는 8시, 점심은 낮 12시 저녁은 오후 6시이며, 비상벨이 울리면 즉시 갑판으로 모일 것 등등 잔소리가 좀 길다.

이어서 선박투어. 구명복은 갑판 상단에 있으며, 두 가지로 하나는 구명조끼, 하나는 특수제작된 구명복인데 누워서 착복하도록 되어있다. 색깔은 붉은 색으로 지퍼가 달려있으며 방수처리 되어있어 찬 바다 속에 빠져도 30~40분 정도를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어깨엔 위치를 알리는 조명기구와 호루라기가 달려있으며 서로 흩어지지 않게 묶을 수 있는 클립도 달려있다. 구명복이 아무리 좋더라도 저 옷을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이번 항해의 주요목적인 고래모니터링 요원회의가 진행되었다. 2인1조로 2시간씩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을 교대로 하기로 하고, 리비(호주의 생물학자, 해양생물 전공)와 문 선생이 한조, 윤과 마가 한조씩 맡기로 했다. 리비는 고래가 발견된 위치보다 발견되는 종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뱃머리 좌우에 서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되, 시야는 180도를 유지하도록 하며 평균 항해속도는 7노트로 서행하기로 했다.

첫날밤이라 모두들 긴장했는지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소식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저것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너무 들어서 그런지 발걸음도 발레리나 걸음이다. 우선 중심이 잘 잡아지지 않으니 모두 술취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린다. 화장실에서 변기에 앉을때도 비틀, 좁은 복도를 걸어갈 때도 비틀, 노트북을 펼치면 배멀미가 심해서 속이 좋지 않아진다며 다들 멀리한다.

며칠 지나 선상생활에 익숙해지면 좀 즐거워들 질려나. 이래저래 마음 무거운 첫날의 얼굴들이다. 서해를 향해 운항하는 뱃전에도 빗방울이 뿌리고 있다.

[항해일지② 3월 23일] 망원경 속의 동그란 바다에서 고래를 기다린다
▲ 방조제 배경으로 'SOS 새만금' 
소문이 무성한 배가 서해안의 격렬비열도 근해를 항해하자 한국해군이며 해양경찰청에서 자꾸 무선이 들어온다. 선장실은 똑같은 말, '고래를 조사한다'고 되풀이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사는 아침 7시부터 시작됐다. 첫조는 호주에서 온 해양동물, 그것도 고래전문가인 리비박사와 문 선생. 리비는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 사십대 후반으로 보인다. 자그마하고 예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그러나 리비의 움직임을 하룻동안 지켜본 우리는 금방 알게되었다.

아직 여명이 걷히지 않은 바다는 이내가 끼어 흐릿하다. 그렇다. 바닷빛깔은 원래 푸른색 한가지의 색이 아니었다. 바다의 색깔은 하늘의 마음의 주소다. 하늘이 흐리면 바다도 흐리고 하늘이 쾌청하면 바다도 쾌청해진다. 하늘이 우울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바다는 더 우울한 얼굴로 검게 울음을 되받는다.

삼월의 서해 아침바다는 흐린 청회색으로 머뭇머뭇하다. 항해 이틀째.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고 파고는 1~2m 정도. 기온은 다소 춥다.

리비는 여명이 채 걷히지 아니한 바다를 향해 망원경을 갖다댄다. 찬바람이 얼굴에 맞부딪히는 선두 뱃머리칸에 서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바다의 물결틈새를 관찰한다. 망원경에 눈을 갖다대면 금방 어지럼증이 일어서 속이 메스껍다. 그런데도 저이는 수십년 관찰의 결과를 통해 일렁거리는 시야와 어지럼증 따위는 이미 체화된 듯 하다. 부동의 자세로 배와 함께 일렁이며 망원경과 한몸이 되어 움직일 줄을 모른다. 모니터링에 처음 참여하는 참가자들은 망원경에서 눈을 뗄 때마다 잠시 고통스런 얼굴이 되더니, 한나절이 지나자 제법 익숙해진 얼굴이다.

22일 오후 3시, 군산항에서 서쪽으로 110km 지점에서 다시 고래를 찾는다. 망원경을 눈에 갖다대고 갑판에 서서 몇시간째 바다를 보다보면 바다도 동그랗게 느껴진다. 그 동그란 세상에서 움직이는 고래 등짝을 짧은 순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작은 물보라를 찾아서 눈동자에 힘을 주다보면 일렁이는 물결 하나하나가 모두 고래등짝 같다. 어느 아득한 순간 잠시 일렁이는 물결들은 모두 고래가 되고, 물결에 따라 이는 포말들은 모두가 고래의 호흡이 되어 세상이 잠시 고래등살에 파묻히는 착시에 잠기기도 한다.

머리를 흔들어 혼미해져 가는 의식을 깨우고 눈을 부라리면 다시 냉정한 파도와 물결로 되돌아 온다.

리비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망원경을 잠시도 눈에서 떼지 않는다. 환경연합의 참여자들도 동서남북을 그리고 30분마다 선장실의 해도 곁으로 돌아와 GPS 기록을 통한 위도와 경도, 풍속, 수심 등등을 조사카드에 기록한다.

첫날조사에서 고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고래를 닮은 물건조차 보지 못했다. 드문드문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쓰레기와 갈곳을 몰라 해양을 떠도는 스치로폼, 망원경으로 지나간 생물은 갈매기 수십마리와, 수면에 닿을 듯 힘겹게 날개짓하며 망망대해를 건너는 물새떼 몇마리를 만났을 뿐이었다.

고래를 몇마리나 발견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번 조사에 참여했다는 것과 최선을 다해 조사에 임했다는 결과가 더 중요한 것이리라.

우선은 보름이 넘는 조사기간 동안 선상생활에 지치지 않는 마음과 체력이 필요하다. 엇싸, 엇싸, 흔들림 방지용 막대를 붙잡고 팔굽혀펴기를 한다. 하나 둘, 세엣 넷….

[항해일지③ 3월 24일] 남해안에 가까워질수록 청람빛을 띠는 바다

 새만금 프로그램을 마치고 모두들 피로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 평소 같으면 떠들썩 할 식당도 조용하다. 깊은 밤, 배는 더욱 심하게 흔들려 저절로 잠자리는 마치 파도위에 누운듯 물결의 쏠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귓전에는 밤새도록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마저 들리니 잠자리마저도 바다 속 용궁인듯 하다.

서해안을 벗어나 제주로 향하는 길목에서 하루종일 파도를 만났다. 고물이 하늘 높이 치켜올려졌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산더미만한 파도를 만날 때마다 옆으로 기우뚱거린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고, 중심을 잡기위해 무엇이든 부여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주방에서는 냉장고 문이 열려 아껴두었던 소주가 두 병이나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지럼증과 구토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렀던 숙소에는 서랍장이 모두 열려 내용물이 바닥에 뒹굴고, 화장실에 세워두었던 걸레와 쓰레기통이 이리저리 쏟아져 뒹군다.

▲ '멋진 여전사' 카타리나   

이런 상황에서도 용변을 봐야하는가? 다들 난감한 표정이다. 그나마 겨우 안으로 들어서지만 기우뚱거리다 보면 중심을 잡기도 어렵다. 당연히 변기에 제대로 앉아지지도 않는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은 마치 자신이 원래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인데 잊고 있었다는 듯, 용감하게 전진하고 후퇴한다. 사무실 의자가 복도까지 재빠르게 걸어나와 선상으로 더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고, 여행용 가방도 방을 나와 복도에서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그런데 가고자 하는 방향은 모두 같다.

남해안에 가까울수록 바다는 깊은 청람빛을 띤다. 맑아지는 것이다. 파도의 길이가 너무 길어 가늠하기도 힘들다. 500톤의 철선도 파도의 위력 앞에는 가랑잎 한 장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힘찬 파도더미에 파묻히지 않고 오뚜기처럼 복원을 거듭하는 것이, 당연한 기술이건만 고맙기조차 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네 대의 망원경은 각자의 위치에서 고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요지부동이다. 배가 요동치니 속이 편할리가 없다. 결국 오후에 윤 실장이 한바탕하고는 노래진 얼굴로 다시 갑판 위에 올랐다.

그린피스 대원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조금 위험한 항해가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전혀 아니란다. 하긴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보다 큰 파도는 늘 보던 것이겠지. 기울어진 뱃전에 파도가 덮치는데도 카타리나는 파도를 고스란히 몸으로 뒤짚어 쓰면서 선상에서 밧줄을 조이는 등, 작은 체구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새만금 앞바다에서 고무보트를 운전하던 그녀를 보는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레인보우 워리어호의 여전사'라는 대명사가 곧장 떠올랐다. 그녀는 선상에서도 여전히 그랬다.

하얀 거품 이는 바다는 새하얀 눈밭

▲ 주방장 아만다. 
찾는 고래는 보이지 않고 대신 파도가 고래떼처럼 사방에서 넘실댄다. 하얀 거품이 이는 바다는 차라리 새하얀 눈밭이다.

조금전에 마라도를 지났다. 바다에서 보이는 마라도는 기우뚱한 케잌같다. 바다안개가 있어 흐릿하게 보이는데 그래도 며칠만에 만나는 육지라고 지쳤던 눈망울들이 초롱해진다. 지금 배는 서귀포 앞바다를 지나 성산포 쪽으로 돌고 있다.

레인보우호 선상에서 이 배에 승선한 선원들이 유일하게 마주치는 공간은 식당(MESS ROOM)이다. 이곳에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신문이며 영화(비디오)도 본다. 그날의 청소당번도 이곳의 벽에 공지되어 있고, 회의시간도 작은 칠판에 적어둔다. 누구나 하루 한끼 이상은 밥 먹으러 올테니까, 결국 모두에게 조용히 공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주 쉬거나 놀고 있으면 은근히 눈치가 보인다. 어디에 청소라도 하고 있어야 덜 미안한 분위기다. 레인보우워리어호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고 통제를 하고 있어 모두가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오늘 오후에는 모처럼 높은 파도덕분에 갑판 일을 잠시 쉬었고, 그 틈을 타서 대원 서너명이 모여 스파이더맨을 보았다. 우리팀은 대부분 '봤다'며 재미없어 하고, 그린피스 대원들은 아이들처럼 신나하며 모처럼의 자유시간을 즐기고 있다.

대원들 모두 국적이 다른 것처럼 성격들도 제각각이다. 별명 붙이기 좋아하는 우리의 습관이 어디로 가나. 벌써 몇몇 대원들의 이름 대신 한국말로 된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잔소리쟁이 갑판장 오스카에게는 '규율반장', 자원봉사는 당연히 '자봉', 주어진 일을 곧잘 하면서도 꼭 궁시렁거리면서 하는 플라비오는 '궁시렁', 푸근한 웃음을 가진 마틸다는 자연스레 '마틸다 아줌마', 손만 대면 뭐든 잘 고치는, 자신의 집도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는 전직 해군 닐은 '닐가이버'….

오늘 저녁은 제주도 인근해상에서 다시 흔들리는 잠들을 청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