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이 한국GM 사무직 근로자들이 사측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과 달리 ‘업적연봉’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자 재계에서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는 그동안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던 판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 ‘성과에 연동돼 있고 개인별로 지급액의 차이가 있는’ 업적연봉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 통상임금 기준에 더욱 혼선이 왔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대법원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정치적 해법을 내놓을지 주시하는 분위기다.

▲ 대법원

대기업 사무직도 통상임금 소송 가능성

서울고법 민사15부(부장판사 김용빈)는 한국GM 사무직원 강모씨 등 102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업적연봉을 포함해 모두 82억3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1심 재판부는 업적연봉은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심서 판결이 뒤바뀐 것이다.

한국GM은 2000~2002년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일률적으로 적용하던 상여금을 직원들의 인사평가에 따라 변동되는 업적연봉으로 전환했다. 즉 인사평가 결과에 따라 기본급을 달리 지급하고 월 기본급의 700%를 이듬해 12개월로 나눠 업적연봉을 줬다.

1심은 이를 반영해 인사평가 등급에 따라 지급금액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고 업적연봉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업적연봉도 기본급과 마찬가지로 근무성적과 상관없이 결정되고 최초 입사자에게도 지급된다"며 "연초에 정해진 업적연봉은 12개월로 나누어 지급될 뿐 그 액수가 달라지지 않고 그 해에는 고정돼 있으므로 정기성, 일률성, 고정성을 모두 갖춘 통상임금“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또 "강씨 등의 임금 항목 중 업적연봉, 조사연구조직관리수당, 가족수당 중 본인분, 귀성여비, 휴가비, 개인연금보혐료, 직장단체보혐료는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통상임금으로 봐야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번 판결이 생산직이 아니라 한국GM의 사무직들을 대상으로 한 판례라는 점에서 업적연봉을 채택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의 사무직 근로자들이 통상임금 소송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기업 통상임금 부담 38조5000억원

통상임금 소송은 한국GM 개별 기업의 이슈가 아니라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의 대형 제조업체들에 모두 해당되는 사안이다.

한국경영차총협회(경총)은 통상임금 소송에 따른 기업들의 우발채무액이 38조500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6조~7조원, 현대중공업 2조원, 한국GM 1조원 등이다.

맥쿼리증권은 국내 자동차와 조선업체가 올해 소송에서 패소해 통상임금을 재조정할 경우 일시적으로 부담해야 할 인건비는 올해 예상 이익의 20% 수준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등 3개사가 일시 환급해야 할 비용이 2조5000억원을 웃돌고 넘고,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미포조선 등 4개 조선업체도 5610억원 수준으로 예상했다.

다소 보수적으로 보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도 21조 9000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GM은 통상임금 소송에 대비해 지난해 결산에서 8140억원을 충당금을 반영한 상태다.

게다가 한국GM에 대한 고법 판결은 기존에 생산직들의 상여금을 포함시킨 데 이어 이번에 사무직들의 업적 연봉까지 통상임금으로 인정해 기업들의 부담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생산직 뿐만 아니라 사무직까지 소송에 나설 경우 기업들의 투자활동이나 고용도 위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계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판결해야”

이처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듦에 따라 재계는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경총이 창구가 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총 고위 관계자는 “상여금 뿐만 아니라 업정연봉도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게 재계의 판단이나 재판부에 따라 다른 판결이 나오고 있다”며 “통상임금의 기준과 범위에 혼선이 없도록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같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원 교수는 “일률적으로 지급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이라고 대법원에서 판결함에 따라 산업계 전반의 소송 증가와 노사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며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로 판결해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대법원의 행보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동향도 주시하고 있다.

지난 5월 미국을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니얼 애커슨 GM 회장이 통상임금 문제로 인한 한국사업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꼭 풀어가겠다”고 답했고 대법원 역시 이같은 발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정부(고용노동부)는 원칙적으로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왔다.

고법판결에 대한 한국GM의 대응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 GM 본사와 어떤 식으로든 협의를 거쳐 항소 등 대비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국GM은 지난 26일 고법 판결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판결문이 오면 어떻게 할지를 검토하겠다”며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민주노총은 “대법원이 1994년 육아수당, 1996년 휴가비·교통비 등 복리후생비, 2012년 3월 정기상여금 등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등 통상임금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며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못 받았으니 사용자들이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