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표적인 경극 ‘패왕별희’는 초패왕으로 일컫는 항우(項羽)의 이별과 죽음을 소재로 한 역사극이다. ‘사면초가’ ‘권토중래’ 및 ‘역발산기개세’ 등으로 회자되는 문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배경의 예술작품들은 승자를 미화하고 영웅시하는 경향이대부분이지만 패왕별희는 패자의 슬픈 이야기다.

진(秦)나라가 멸망한 직후 중원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초한전쟁(楚漢戰爭)때 한왕 유방(劉邦)에게 패주하다 막판에 몰린 항우의 최후를 극화한 것이다. 애첩 우희(虞美人)와 애마 오추마의 등장에 맞춰 한군의 진영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면서 시작된다. 유방이 초나라 병사들의 사기저하를 위한 심리전으로 한나라 군사로 하여금 초나라의 구슬픈 민요를 부르게 한 것이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초나라 군사들이 도망을 치기 시작하고 전세가 기울었음을 안 항우는 하늘을 우러러 ‘해하가(垓下歌)’를 읊으며 탄식한다.
 
이때 우희는 항우의 기분을 돋우려고 술잔을 따르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 우희는 유방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라는 항우의 권유를 일축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고, 뒤이어 항우도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친다는 단순하고 슬픈 이야기다. 수 년 전 ‘패왕별희’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경극 패왕별희는 더욱 유명세를 탔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크고 작은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뮤지컬, 무용, 노래 등의 예술작품이나 문화컨텐츠로 개발한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잘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 명성황후, 삼국지 등도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역사적 흔적을 큰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 또한 수 없이 많다. 이는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아프고 부끄러운 사실도 그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패전의 현장인 칠천량 해전이 근래에 다시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거제의 둔덕기성은 고려 18대 왕인 의종이 무신정변으로 3년간 유폐되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 배경이나 내용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패왕별희와 견주어도 별반 손색이 없다. 등장인물도 초패왕 항우와 고려왕 의종이 서로 버금가듯 대비된다. 항우의 애첩 우희와 의종의 애첩 무비의 기구한 운명도 비슷하고 경극과 무용극 모두 대사 없이 동작으로만 구성된 점도 흥미롭다. 그 내용도 패자의 슬픈 이야기가 배경이 된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스토리텔링의 원형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의종은 그동안 세인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하고 있다. 무신정권이 너무 오래 집권한 과거의 탓도 있겠지만, 역사의 현장이자 유적인 거제기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 거제인들 조차도 별반 관심을 갖지 않은 듯하다. 다행히 의종과 기성의 역사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대내외에 알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지역 예술단체가 있다.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거제지부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거제 의종폐왕무’라는 창작 무용극으로 각종 행사에서 꾸준히 공연활동을 해 오고 있다. 지난 경남무용제에서는 이 작품으로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는데 거제의 역사적 특성을 잘 살린 완성도 높은 공연작품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내용은 정중부 등 무신난을 배경으로 의종이 해무가 덮인 거제도 견내량 뱃길을 건너는 과정, 절치부심 둔덕기성에서의 유배생활 중 마고할미의 도움으로 우물과 천재단을 쌓고 기도를 올리는 과정, 복위의 검을 하사받고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는 과정과 복위를 향해 출전하는 과정 등을 4~5막으로 연출하였다. 초반 무신들의 검무에 이은 선녀들의 연등춤, 희망의 깃발춤, 환상의 나비춤으로 의종의 의지와 심경을 표현하였고, 마고할미가 마법으로 성을 쌓는 장면이나 동자들과의 익살스러운 동작은 관객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지난해 ‘유배문학추모제 특별공연’에서는 거제도에서 유배 중이던 정서가 의종과 조우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정과정곡’이 거제도에서 창작되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유배문화에 대한 트렌드가 최근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 거제도는 해양조선산업을 배경으로 급속히 성장한 역동적인 도시임에 반해, 대내외적으로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적 컨텐츠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역 예술계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적자원과 예산상의 한계가 있어 자체적인 컨텐츠 개발은 사실상 어려움이 많다. ‘가장 거제적인 것이 한국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거제시와 지역예술계가 함께 소재와 자료들을 발굴하고 문화컨텐츠로 개발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의 ‘패왕별희’에 버금가는, 가장 거제적이고 전국적이며 세계적인 ‘거제 의종폐왕무’의 발현을 기대하면서 필자의 졸시 의종추모가(毅宗追慕歌)를 읊조려 본다.

서라벌 천년영화 에밀레종 울음하고
까마귀 날갯짓에 석류처럼 갈라진 터
황룡사 소나무 깎아 고려왕조 세웠나니

청자백자 곱게 빚던 임들의 섬섬옥수
천만 겁 이어 나갈 대장경 받쳐 드니
오호라 태평연월이 연등처럼 곱게 피네

나라를 다스림에 칼과 붓이 다를까만
문무간의 패인 골이 봇물처럼 터져나니
깃발도 펄럭임 멎고 핏빛으로 흐느낀다

거제도 둔덕기성 위리안치 유배 삼 년
키워오던 복위의 꿈 피우지도 못한 채
한 줌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간 의종임금

비에 젖은 산바람 차마 산성 못 떠나고
주인 잃은 성벽은 이끼 덮고 몸 졌는데
견내량 파도소리만 임의 넋을 달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