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아온 기회

▲ 손영민

'거제의 삶...꿈....' 이라는 전원주택에 대한 최초의 책을 펴낸 후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 왔다. 남을 인터뷰하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으면서 거꾸로 인터뷰를 당하고 보니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그런데 그럴 때 마다 꼭 빠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손 작가께서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마치 "남들에게는 전원주택에 나가 살라고 하면서, 그러는 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추궁 하는 것 같은.

사실 나 자신은 일찍부터 전원주택에 나가 살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맞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원주택에 나가 살려면 당장 아내에게 출퇴근용 승용차를 따로 한 대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럴 비용도 문제려니와 아내의 운전솜씨가 시골길을 마음대로 달릴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전원주택 취재차 거제도 일원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나는 그 덕에 길눈이 밝았지만, 시골길은 고사하고 고현 시내도로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내에게 혼자 출퇴근을 하라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2000년 상반기에 내가 운영하는 공인중개사사무소에 아내가 근무하면서 서서히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에 ‘아는 게 병’이 되는 수 가 많다. 약5년 간 전원주택 취재를 하러 다니는 동안 거제도 땅에 대한 내력을 대강이나마 알고 나니 선택에 혼란이 왔다. 부동산 상담이나 부동산칼럼 기고 등을 통해 전원주택 터 잡기 요령을 설명할 때마다 강조하는 원칙이 있었지만 막상 나 자신은 그 원칙을 따르기가 어려웠다.

그 원칙이란
첫째, 가능한 총 투자비규모(땅값과 건축비로 나누어서)를 정하고
둘째, 원하는 땅의 규모를 정한다음
셋째, 직장과의 출퇴근 거리를 감안해 방향을 정하고 답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시골은 땅값이 워낙 천차만별이어서 가격 선을 먼저 정해놓고 그 수준의 땅만 보러 다니지 않으면 수평 비교가 되지 않아 선택에 엄청난 혼란이 생긴다. 예를 들어 평당 20만 원선을 기준으로 5만 원내외의 융통성을 두고 땅을 보러 다니면 우선 땅을 소개해 주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얘기가 빨리 진행된다. 같은 가격 선에서 조건을 비교 하다보면 땅을 고르기도 쉽다. 그럴려면 먼저 투자비와 땅의 면적 규모가 정해져야 한다. 투자비 면적이 정해지면 구입 가능한 평당 가격선이 저절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땅값으로 6천만 원을 정해두고 최소한 200평의 땅을 갖고자 한다면 평당 30만 원 이하로 대상이 좁혀진다.

그러나 나로서는 취재목적상 가격 선에 관계없이 입지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답사를 두루 다녔기 때문에 항상 가격보다는 땅 자체를 먼저 보게 됐다. 우습게도 나 자신은 남들에게 강조한 그런 요령에 훈련이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마음에 드는 땅은 값이 너무 비쌌고 값이 적당한 땅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무렵 후배 한 명이 부산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원주택에 나가 살기 위해 터를 고르는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후배였는데, 부모님이 부산에서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다며 전원카페라도 차려 볼까한다는 얘기였다. 전 재산을 처분해 부산을 떠날 준비를 먼저 해놓고 터를 고르러 다니던 처지라 상당히 사정이 급했다. 그래서 동부면 근교 지역의 쓸 만한 땅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소유하고 있던 밭을 일부만 때내어 팔려고 하는데 구경해 보라"는 연락이 왔다. 큰 강은 아니었지만 제법 널찍한 개천이 바로 옆에 흐르고 있는 데다 집터 정면에 보를 만들어 놓아 항상 물이 넉넉하게 고여 있었다. 그리고 고현시내와 연결되는 버스종점과 30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카페가 들어서기에는 그런대로 입지 조건이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부산을 떠나기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 후배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일이 그리 되고 보니 어렵게 구해놓은 땅이 아까웠다. 땅값이 당초 정해놓은 예산보다는 높은 수준이었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대로 친하게 지내던 다른 후배와 둘이서 그 땅을 사들였다. 본래 그 땅을 사려고 했던 후배는 전원카페를 하기에 적당한 터의 조건에 따라 그 땅의 가치를 따졌지만 나는 다른 이유에서 그 땅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물론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터 앞으로 기존 주택이 여러 채 들어서 있어 남향의 전망을 가리고 있었다. 개천과 산이 북쪽에 있어 뒤쪽 전망은 괜찮았지만 앞쪽으로는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그 점은 북쪽의 전망에 무게를 더 두는 것으로 넘어 가기로 했다. 남향은 일조권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만족하고 전망은 북쪽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터를 잡아 2002년 초 평당 45만 원을 주고 150평을 사들였다.

3천만 원의 융자를 받고 만기가 된 적금을 무두 찾았는데도 1천만 원이 모자랐다. 건축에 착수하기도 전에 고현의 아파트를 처분하기는 일러 땅값을 조달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중도금을 넘겨주기로 한 약속날짜를 하루 앞둔 저녁까지 1천만 원이 마련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아내를 설득하느라 자금문제도 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앞이 막막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내가 슬며시 1천만 원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동안 생활비를 아껴 조금씩 모아두었던 비자금을 몽땅 털어 마련한 자금이라는 얘기였다. 그 순간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감사의 편지를 썼다. 다 끌어 모은 돈이 1천만 원이었던 것도 내게는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땅값을 겨우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