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은 산에서도 천하 지대본(天下地大本)

▲ 손영민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고 하지만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직업별로 엄격한 귀천의 순서가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는 이순서는 1천년 넘게 내려온 신분의 서열 이었다. 그러나 요즘 사농공상을 얘기하면 "웬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냐"며 코웃음 칠 것이다.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의 뼈대를 내 새우고 있는 요즘에는 '상공사농(商工司農)' 으로 서열이 바뀌었다. 농업국가에서 공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키워가는 나라가 되고 돈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다 보니 돈 잘 버는 직업이 최고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공상(工商)의 직업이라고 해서 예전처럼 학문적 바탕 없이 몸과 경험만을 밑천으로 삼고 입신(立身)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신분상승의 주요 원인이다.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은 어떤 면에서는 선비 못지않게 이론 무장이 철저하게 돼 있어야 한다.

농업이 4가지 직업의 맨 뒷줄에 서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고 폐가가 늘어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런 마당에 농부가 세상의 근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농악놀이 때 쓰는 장식용 기치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골 의 주인은 여전히 농부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시골 땅에 대한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는 농지법이나 산림법은 물론이고 토지의 기본법인 국토이용관리법의 기본원칙은 아직도 농부가 세상의 근본이다.

우선 시골 땅을 마음대로 사고 팔수 있는 권리는 농부에게만 주어져 있다. 농지는 물론이고 임야도 그렇다. 넓게 보면 임야도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땅이기 때문에 농부 즉 농업인이 쓰고자 한다면 모든 규제에서 예외로 인정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농업인의 자격을 갖출 수만 있다면 시골 땅에 관한한 어떤 곳에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다만 보전임지 중 보안림, 시험림, 채종림, 천연보호림의 경우는 농업인이라 해도 전용이 허용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용도의 임야는 나무가 울창한 깊은 산속이 대부분이라 전원주택지로 허용되더라도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원주택지로 탐을 낼만한 농촌마을 근처라면 농지든 임야든 아무 곳에나 터를 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업인의 특권이다.

거제시 동부면 오송리 해안에 정말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장만한 이상구씨. 이씨는 93년 여름, 이곳의 농업진흥지역 농지 250평을 장만해 진주에서 이주했다. 당장 전원주택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전세살이를 했다. 그때만 해도 농업진흥지역에 농사를 지으려면 현지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정도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현지로 이사하고 보니 300 평(당시는 최소면적기준이 300 평 이상이었음)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농업인주택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집터를 제외 하고도 300 평 이상 농사를 짓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300여 평의 농지를 추가로 구입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농지매매증명 발급규정에 따라 현지에 거주한지 6개월이 지나지 않으면 구입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는 사이에 전세기간(1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 일대에 전원주택 붐이 일면서 타지에서 내려오는 전세수요가 갑자기 느는 바람에 전세기간을 연장하지 못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이 씨의 눈물겨운 '시골 집짓기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먼저 확보해놓은 부지 2백5십 평에 컨테이너씩 간이 주택 2동을 설치하고 피란살이와 같은 시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고생길이 훤했지만 거제만이 인접한 그 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다른 곳에는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현지 거주기간 6개월을 채워 3백 평의 땅을 추가로 매입하고 그곳에다 참깨며 고추를 심었다. 고현 한복판인 시청부근의 직장에 매일 출퇴근 하면서 그런 일을 해냈다. 일단 농사를 시작하자 자격이 되는 줄 알고 건축을 신청했더니 최소한 한번은 추수를 해야 농사지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년의 세월이 또 지났다. 갖은 곡절을 다 격은 끝에 건축허가가 나온 것은 95년 5월, 컨테이너 생활을 한지 1년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격은 고초를 말하자면 소설책 한 권으로 역어도 모자랄 정도이지만 지금 평당 100만원이 넘는 금싸라기 땅의 주인이 돼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격은 고생은 보상받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고생을 격을 각오만 돼있다면 이 씨의 경우처럼 갈매기때 울어대는 해변 언덕뿐만 아니라 산 너머 남촌의 양지바른 산자락 어디든지 가장 좋은 터를 골라 전원주택을 지을 수 있다.

이때 산술적으로는 농사짓는 기간 1년을 포함해 1년6개월 정도면 도시인도 농업진흥지역이나 보전임지에 터를 잡아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므로 넉넉잡아 그 2배의 기간을 각오하고 덤벼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