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생활은 또 다른 사회로의 진입'

▲ 손영민

어떤 사회나 그 나름대로 틀을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같은 지역 내 사람들 끼리는 이 보이지 않는 룰이 그들끼리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내는 바탕이 되지만 바깥사람들 에게는 종종 텃세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이 텃세를 무시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토박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이 된다.

도시에서는 이미 마을 이라는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여서 텃세라는 것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이런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시골에서 살려면 그 동네 나름대로의 이런 텃세를 극복하는 통과 의례를 잘 치루어야 한다.

다행히도 시골마다 이렇게 하는 통로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우선 공식적으로는 동네이장과 부녀회장이 1차적인 창구가 될 수 있고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사는 동족부락이라면 가문의 윗어른이 그 대상이다. 동네에 구멍가게가 있다면 구멍가게 주인이 대게는 그 동네의 소식통이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1차 정보 수집을 한 다음에 인사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인사를 하러 갈 때는 양말세트나 청주 한 병 정도의 부담이 되지 않는 가벼운 선물을 챙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절차는 동네로 이사 오기 전에 마쳐야 한다.

이사 오는 날에는 동네 집집마다 떡을 돌리며 신고를 하고 좀 더 여유가 있다면 돼지고기를 마련해 막걸리 판이라도 벌이면 금상첨화다. 1차 신고를 한 다음에는 이를 다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마을 경조사를 챙기는 것이 기본적인 요령이다.

경조사라고 하면 도시사람들은 결혼·회갑연이나 초상이 났을 때를 생각한다. 물론 그런 일은 대사(大事)에 속하는 일로 절대로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되지만 그밖에 챙겨야 하는 날들도 많다. 우선 집안 가장의 생신을 꼽을 수 있다. 최소한 가장들끼리는 같이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축하인사를 해야 한다.

또 동네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제사를 지낸 다음날 아침에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삿밥을 나눠 먹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이 모두 시골사람들의 인정이고 시골 사는 맛이다.

서울에서 거제 일운면으로 이주한 이모씨(55세)는 그래서 집안에 항상 1만원~2만 원 정도의 선물 꾸러미를 서너 개씩 준비해 두고 있다. 아직 동네 사람들의 생일이며 자잘한 경조사 날을 다 외우지 못해 아침에 갑자기 ‘한 잔 하러 오라’고 부를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이런 세심함에 그보다 몇 배 더한 인정이 보태져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다.

오랜만에 별미 음식을 만들었을 때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 것도 정을 쌓아가는 좋은 방법이다. 그 보다 더 좋은 방법은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 같이 일손이 귀한 시골 형편에서는 허드렛일이나 농사일에 도시에서 온 사람이 동참해 주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마워한다.

본격적인 품앗이를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손을 덜어주면 시골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그전에 시골 일을 하는 요령을 미리 익혀 두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최소한 도와준다는 것이 일을 망칠 정도는 되지 말아야 몸으로 때우는 것도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인데도 워낙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온 도시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겼다가 큰 코 다치는 것이 바로 이 통과 의례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최소한 시골생활이 한 번도 경험이 없거나 떠난 지 오래돼 몸에 배어 있지 않은 사람이 낯선 땅으로 들어갈 때는 '이민 가는 각오'로 떠나야 한다고 까지 말한다. 아무려면 풍습이 전혀 다르고 말이 다른 외국에 정착하는 것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시골에서는 그만큼 이웃을 사귀는 일이 중요 하다는 뜻이다.

시골에 터를 잡는 것은 단순히 살집을 마련 한다는 차원을 넘어 도시와는 전혀 다른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통과의례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낯선 사회의 문턱을 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문턱을 넘지 않고 문안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통과 의례를 거치지 않고 시골사회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