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엣세이
                                              도토리묵
                                                                                    김운항
가을이 다가오면 내마음은 또 하나의 일로 분주 해진다.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드는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십수년 동안 한해도 거른 적이 없으니 무슨 선의식 같다 힘들게 도토리묵을 만들어 본들 난 겨우 한덩이면 족하고 장에 내다 팔일도 없이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고작인데 왜 해마다 도토리묵 열병을 앓아야 할까?

간만에 음식 투정을 해 봅니다
가을산에 다가 가
가시에 핥켜가며 힘들게 주워 모은 도토리로
절구에 찧고 채로 쳐
애써 만든 묵
멸치 다시물 잘분히 붓고
잔파 송송 구운 김 부셔 넣어
맛깔난 양념장에
묵채를 먹고 싶은데

샛바람에 뒤집힌 후박나무 이파리처럼
샐쭉해진 마누라

이런 날에는 회초리 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그리움(윤들19) 전문

이유는 어머니다 당신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열여덟에 역시 거창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거제로 왔다 거창은 내륙지방이다 보니 생선을 주먹거리로 하는 거제와 달리 산채같은 채소 위주의 음식 문화가 더 발전했던 것 같다 7남매인 우리 형제들은 어릴적 왠지 비린 남의 집 밥을 잘 먹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당신은 봄에 산나물이 나기 시작하면 산으로 들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홀잎(화살나무 어린순),두릅,취나물,삿갓나물,삽초,비비추,원추리,합다리,콩나물,참나물 같은 것은 주로 제철에 먹는 나물이였고, 고사리, 고비, 다래순, 아주까리 이파리 같은 것은 데쳐서 고이 말려 묵나물을 만들었다

합다리가 한창일 때 쪽파와 알배기 굵은 멸치를 밀가루와 버물러 쪄낸 합다리멸치찜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 몇 년전 흉내를 내봤지만 당신이 한 맛에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다시는 먹어보지 못할 음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월 대보름날 무치고 볶아낸 우리집 묵나물은 근동의 자랑이였고, 들기름에 볶아낸 아주까리이퍼리를 먹어본 근동의 아저씨는 무엇인지를 연신 물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적어도 반경 오리 정도는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산골이였던 우리집은 봄철 모내기 품앗시 때면 이웃한 옥림 동네에서 재너머 우리집에 모를 심어 주러 서로 오겠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순전히 당신의 음식 솜씨 때문이였다. 모심는 것보다 모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생전에 당신의 말씀 중에 거제로 첫 시집을 와 옥림에서 방앗간을 하는 제일 부자집에 모내기 품앗시를 갔는데 모밥이라고 나온 반찬이 달랑 한가지, 멸치젓이였다 한다. 정어리 만한 놈에다 양념이라고는 고춧가루 하나 안발리고 풋고추 쪼가리 몇개가 전부인데 바다에 던지면 금방 살아 갈 것 같이 눈깔이 또록또록 하고 시퍼래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어 바닷물을 떠다 숫갈에 적셔 가며 드셨다 했다.

육지와 섬의 문화 차이기도 하련만 거제 음식의 첫 대면 치고는 고약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지 당신은 평생 덜 비리고 담백한 명태와 볼락외에 다른 생선은 드시지 안았다. 사철 바지런했던 당신은 가을이면 우리 형제들을 산으로 내몰아 상수리 열매며 굴밤 ,도토리를 주워 오게했다. 묵을 하기 위해서 였다.

도토리가 적게 나는 해는 시절이 좋은까보다 하시며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주워 온 도토리를 지금은 방앗간에서 쉽게 빻으면 그만인데 그때는 식구대로 붙어 절구에서 곱게 빻아서는 채로 쳐 껍데기는 가려내고 우리는데 간장물 같이 벌건 물을 따르고 또 새물을 붓고 하여 밤새 우려내서는 치대고 또 치대서 한알갱이의 전분도 남김없이 뽑아내서 적당히 농도를 조절하여 물을 붓고 가마솥에 앉혀 장작불을 뭉긋이 지펴 하염없이 저어대다 보면 엉기다가 북덕북덕 끓기 시작하고 반소끔 정도 더 끓여 퍼내서 식히면 도로리묵이 되었다

어린 날 주걱에 매달려 묵솥을 젔던 일은 고역이였지만 보상으로 받은 묵을 퍼내고 눌어 붙은 묵누렁지 한덩이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메밀묵을 할때면 묵숭늉 하며 묵채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이렇게 힘든 도토리묵을 해마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거제로 시집 와 근동에서는 아마 젤 처음 도토리묵을 했던가 보다 근동의 사람들은 신기 해 했고 그맛을 보고는 잔치때면 도토리묵을 부탁 해 왔던 것이다 그당시 다양하지 못하던 잔치상에 도토리묵은 진객이였으리라. 물론 다른건 그런대로 풍족했지만 산중이라 세마지기도 안되는 적은 논이다 보니 항상 쌀이 부족했기에 도토리묵으로 돈이 만들어지면 쌀도 팔았고 막내인 나의 학비를 대었을 것이다
 
가을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맹근다
절구에 빻고 찧어
아작아작 가루를 내
흐르는 물에 우리고 거르고 갈아 앉혀
차지고 구신 녹말과 찌꺼기를 야무지게 나눠서는
찌꺼기는 고이 두고
거른 녹말을 솥에 앉혀 알맞춰 물을 붙고
장작불을 지피고
사랑을 마시듯 연기를 마시며
쉼없이 저어대면 시나브로 엉기게 된다
사랑이 엉기듯
북덕 북덕 소리를 내며 끓어 오르고
사랑이 끓어 오르듯
반소끔 더 끓여서 퍼내어 식히면
사랑이 식어야 열매를 맺듯
도토리묵이 된다
농창 농창 도토리묵이다

이 둔 찌꺼기는 청보리밭 골에 뿌린다
쭈삣 쭈삣 청보리가 웃는다

나도 묵이 되고 싶다
내 찌리고 역한 오줌보며 탁한 피를
갈고 우리고 침전 시키면 전분이 나오고
한소끔 끓이면 묵이 될 수 있을까
남은 찌꺼기는 쓰레기로 남지 않고 소용되는 곳이 있을까
청보리 밭에 뿌리면 웃어 줄까
떫떠무리 하면서도 쌍기한 맛을 내는 묵이 될수 있을까
내가 묵이 되면 무슨 맛이 날까
나도 묵이 한번 되어 봤으면 좋겠다.
도토리묵, 전문

당신이 가신지 어언 12년 가을이면 으레이 도토리묵으로 사모곡을 쓴다.  도로리를 줍고 묵을 하다보면 당신이 그기 나투시기 때문이다. 요즘은 꿈속에서도 볼 수 없는 당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글어 호올로 떨어져서는
모여서 부비다
짓찧어져 갈려서는
치대고
우리고 걸러지고
차진 녹말만 남아
무쇠솥에서 몹시도
뜨겁고 나면
성스러운 선의식 같은 거
엉기어 뭉쳐진다
비로소 한덩어리가 된다
아낌없이 뜨거워지고 싶다
너와 나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윤들 일기9 전문

나는 언제나 도토리묵을 하면서 나를 들여다 본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도 생각 해 본다. 도토리묵처럼 하나로 엉기기를 바래 왔다. 내생각과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단정 지었다. 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과욕이였던가! 각기 다른 생김새와 생각들, 삶의 모양새가 다른데 어찌 내마음같이 하나가 되리 분명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를 뿐이였는데....
이를 인정하는데 제법 긴 세월과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모든 것을 깨우치는 날 다시 도토리묵을 쑤리라. 오늘도 묵을 쑨다. 나투신 당신이 빙그레 웃으신다 내 작은 가슴속 온기로 도토리묵을 쑨다 비로소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가 되어 엉기어 갈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