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의 저편
                                                                                          우 광 미
“술 좀 사 주시면 안 될까요?”
밤늦게 걸려온 전화다. 그는 수능시험을 마치고 친구 두 명과 같이 있으니 술을 사 달라한다. 잠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하고 보호자와 같이 동석을 하겠다하니 거절할 명분도 부족하다. 미성년자인 그들을 데리고 갈 술집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집 근처 가장 가까운 술집 앞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저만치 그들이 보인다. 해마다 수능 추위는 밤을 지배하고 있는 듯, 긴장 풀린 해방감만큼 잦았을 그들의 입김이 겨울 밤하늘에 피어올랐다. 찬바람이 우리를 더욱 빠른 걸음으로 몰아세운다. 술집은 윈도우에 물기가 안개처럼 맺혀 있다. 온기 탓이려니 하면서도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스텐 바구니가 놓여 있다. 먹고 싶은 술을 골라 가져다 먹는 술집이다.
형형색색의 맥주들이 진열장 안에 있다, 각국에서 수입되어 온 것들이다. 각기 다른 맛과 알코올의 농도도 다르다. 마치 그 속엔 인생의 달콤한 맛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내 맛이 제일이라는 듯 화려한 색을 발하고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이 맥주 앞에 섰다. 각양각색의 맥주 앞에서 선택의 혼란을 맛보고 있다.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어색하여 초콜릿 맛이 강한 맥주 한 병을 골라 먼저 자리로 왔다. 호기심 가득한 그들은 이내 나와 같은 술을 바구니에 담는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맥주도 가져와 맛보기 시작한다.
이제 인생의 진열장에서도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 맛보려 할 것이다. 더러는 달콤함에 앞뒤 잴 틈 없이 들이키기도 하고, 머지않아 단맛에 가려진 알코올의 힘을 깨닫게도 될 것이다. 어느새 취하게 되고, 흔들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그렇겠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이 가진 이면을 알아채지는 못하겠지. 보이는 것에 좌우되어 선택한 달콤함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지도 알게 되겠지. 그 답은 자신이 직접 찾아야 한다는 것도. 찾은 답이 오답이라 할지라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도.
그 날도 이렇게 추위가 외투자락을 움켜쥔 날이었다. 졸업식을 마친 후 선배를 따라 갔다. 조도가 낮으면서도 고급스런 칵테일 집이었다. 그녀가 주문한 칵테일은 길쭉한 모양의 잔에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의 술이 담겨 있었다. 알코올의 비중이 서로 달라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에 바텐더가 불을 놓으니 잔 위에는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무지개가 타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세상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차분했다.
“삶에서 무지개를 찾는다면 이렇게 활활 태워라.”
그녀의 말은 내 가슴에 새겨졌다. 가끔 그녀를 따라 나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보수동 헌 책방 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그 이듬해 그녀는 사랑을 만났다. 세상의 잣대로 두고 보자면 여자의 집과는 대조적인 사람. 그녀의 사랑은 세공사였다. 하루 종일 애꾸눈 돋보기 알을 눈에 끼우고 녹이고, 두드리고, 다듬는 일을 했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자 잠시 그들만의 세계로 사라졌다가 달포가 지난 후에 돌아왔다. 세상의 편견에 밀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부모의 성화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주변과 연락을 끊고 은둔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결혼 후 일 년이 되던 해에 자신의 남은 삶을 뒤로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그녀는 졸업 후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세상으로 나가면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이 가득 할 줄 알았다. 첫 만남에서 맛본 상실의 감정. 그 경험은 후일 나의 결혼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가끔 세상 어디선가 그녀가 무지개를 만나 자신을 활활 태우고 있는 환영에 빠지곤 한다.
아이들의 테이블 위에 빈병들이 쌓여간다. 저 빈병들은 많은 시간을 돌아온 지금 세상 밖에서 찾으려고 한 내 삶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순간 그녀가 말한 건 내 안에 존재하는 세계에서 자신을 활활 불태우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자정이 되어가자 술집은 손님들로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뺨도 붉게 상기되었다. 안과 밖의 확실한 기온 차는 윈도우에 맺혀 있던 성에의 물방울들을 온전히 남아 있게 두지 않는다. 긴 물 꼬리를 남기며 흘러내린다. 맺히고 흘러내리기를 반복하는 윈도우 앞에 서 있다. 성에는 영원히 저편이 아니었다. 우리 앞에 있었다.
밖이 아닌 자신들의 내부로 향한 세상에 그들이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