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도 연가 
                                                                                               이양주
외로운 섬, 홀로 떠 있는 것 같으나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바다가 제 울타리다. 파도가 몸을 일으킨다. 바다와 섬이 서로를 당기고 밀며 끌어안았다 놓는다. 어쩌면 나와 당신도 서로에게 섬과 바다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나는 당신이라는 바다에 뿌리를 내렸는가. 사방이 갇힌 느낌은 아니었는지. 흔들리고 부딪치며 아파했던 건 아닌가.

지심도. 동백나무가 섬 전체에 빼곡히 채워져서 일명 동백섬이라고도 불리는 섬이다. 겨울에서 봄이 오는 길목이면 섬은 피고 지는 동백꽃들로 허공도 땅도 온통 붉은 색으로 뒤덮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의 모양이 마음 심(心) 자를 닮아 지심도(只心島)라 불리는 섬. 오로지 마음인 섬. 나는 왠지 지심도에 오면 닫혀있던 몸과 마음이 붉은 감탄사와 함께 열릴 것만 같은 기대를 하게 된다.

섬에 오른다.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서인지 동백 숲은 어둡다. 지심도의 동백은 수령이 오래되어 키도 눈도 잘 닿지 않은 곳에 꽃을 피워놓는다. 홑동백이라 겹동백 처럼 호들갑스럽지 않다. 속마음을 함부로 들키지 않으려는 듯 짙고 두꺼운 잎사귀 뒤에 숨어 살짝 붉은 뺨을 내민다.  동백은 단박에 다 피지 않는다. 햇살 좋은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동시에 피어나는 그런 순간의 절정기도 있지만, 꽃 한 송이가 며칠을 피었다가 지고 또 한 송이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동백나무는 제 속에 수많은 꽃송이를 품고 있다가 천천히 하나하나 끝끝내 피워내는 것이다. 동백꽃 한 송이로 보면 짧은 것 같지만 동백나무 전체로 보면 꽃의 계절은 꽤나 길다. 지심도는 그렇게 붉게 물든다.

동백꽃들로 허공이 붉게 채워질 때도 좋지만 떨어진 꽃들로 길바닥이 붉게 물들 때는 더 장관이다. 꽃의 목숨이 뚝뚝 떨어져 온 바닥에 낭자한 것 같아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봄은 아직은 인색하다. 소금기가 묻은 바람 끝이 거칠고 맵다. 동백꽃의 조용한 절규가 가슴을 파고든다. 참으로 피기 어려운 계절에 개화하는 동백(冬柏). 한 자리에 뿌리 박혀 꼼짝도 못하고 수많은 몸살을 앓았으리라. 말 못할 곡절을 품은 채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동백의 속내를 어찌 다 짐작하랴. 찬바람을 맞으며 동백 숲에 서 있자니 조선시대 학자 임제(林悌)가 평양 기녀 한우에게 바친 연가가 떠오른다. 고가신조의 운율에 얹어 불러 본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고달픈 인생 멋지게도 노래했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일기예보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아무 채비도 없이 길을 나서서 때론 눈 맞고 비에 젖는 인생이 아니던가. 동백 숲에 노래가 울려 퍼진다. 내 노래에 화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디선가 동박새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엄동설한 속에서도 끝내 꽃을 피웠건만 찾아 올 벌 나비가 없어 서럽다 못해 붉디붉은 동백꽃의 마음을 아는 듯 찾아온다는 동박새. 동백의 속살을 파고들며 꽃 피우게 한단다. 추운 계절에 그들이 맺는 시절 인연이 참으로 아름답다. 임제의 마음이 동백에 서려 있다면 한우의 답가는 동박새와 닮지 않았나싶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스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데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아무리 차갑기로 소문난 한우(寒雨)라 해도 임제의 절창에 어찌 녹지 않았겠는가. 그녀는 찬비 맞는 심경이 어떤 건지 능히 알았을 것이다. 인연이기에 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빗장을 열고 제 안으로 들여 치맛자락을 펼쳐 그를 덮어 주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끌어안지 않는다면 어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건 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얼어 잘 이를 녹여 자게 하는 이. 그게 사랑일 것이다.

지심도의 봄은 동백꽃과 동박새의 사랑이 빚어낸 것이다. 추운 겨울에 피어나야하는 숙명을 지닌 붉은 동백과, 겨울에 꽃을 찾아야하는 동박새의 푸른 울음이 만나 마침내 피워 낸 귀한 봄이다. 봄은 왔으나 또 갈 것이다. 짧은 봄을 어이 탓하며 가는 봄은 또 어찌 잡으랴. 피었다가 지는 것이 꽃뿐이겠는가. 인간의 목숨도 동백처럼 찰나에 떨어지기는 마찬가지. 피고 지며 머무는 그 사이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열정적이었으나 놓아야 할 때는 미련 없이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 동백의 사랑이 짧다고, 속절없다고 말하지 말자. 허무한 사랑이 아닌 무욕(無慾)의 사랑이다.

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선창가로 내려온다. 어느새 내 마음도 붉게 물들었다. 체온도 조금은 올라가 있는 것 같다. 돌아오는 배에 몸을 싣는다. 점점 멀어져가는 섬. 지심도에는 내 사랑 네 사랑 할 것 없이 수 천 수 만 개의 사랑이 있다. 붉은 섬 지심도가 푸른 바다와 몸을 섞으며 저기 살고 있다. 그대 사랑을 품고 싶거든, 그 사랑이 식어버렸거든 지심도로 오라고 말하며…….

*고가신조(古歌新調) ; 옛 노래에 새로운 가락을 얹어서 부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