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에서                                                                                                                                          윤정희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스치는 청아한 바람은 분명 가을이 오고 있음이다. 바다가 보이는 오솔길을 혼자 걷는다. 해질녘 바다는 자신을 온통 비워 노을로 가득 채우고 있다. 어디가 바다이고 노을인지 분별이 안 된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가 어느 사이 바다와 노을과 동화된 기분이다. 황홀하다. 내 노년도 이렇게 저물어 갔으면, 하는 뜬금없는 생각에 문득 지나온 삶을 뒤돌아본다. 내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 지나온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니 분명 봄날 같은 청춘도 있었다.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를 헤치고 힘들게 넘어왔다. 그 속엔 분명 연어를 닮은 중년도 지나갔다. 가을의 나무가 되어 내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살아온 지도 오래 전부터다. 칠순의 고개에 올라섰으니 이제부터 십년의 인생 프로그램을 다시 작성해야 되겠다. 불시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를 더욱 따뜻하게 살피며 다독이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이 칠십, 물론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육신은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제법이다. 누구나 좀 살았다 하면 넘어야 할 고개다. 나이만 보면 언제 어떻게 되어도 여한은 없겠다. 자식으로 살아온 시간과 엄마로 살아온 세월이 비슷해 가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끔씩 철없던 딸로 살았던 날들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어머니의 삶이 내 삶이라는 것을 몰랐을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는지 모른다. 한두 해 전부터 딸들이 동갑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칠순을 암암리에 준비하는 것이 엿보였다. 지난 설에 우리에게 의사를 타진해 왔다. 자식들의 생활이 그렇게 넉넉한 건 아니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을 전했다. 요즘 시대는 조상님들의 기제사나 부모님의 생신도 모두가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에 치르기도 한다. 새삼스레 부부가 동갑인 것이 자식들에게 왜 이리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두를 내어 주었는데도, 공연이 안쓰럽다. 자식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는 미안함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일가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또한 이런 모습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려니 싶었다. 자식들은 흔쾌히 부모의 의견을 따라 주었다. 부모의 마음을 거슬리지 않고 정견으로 봐 주고 가족을 아우르는 마음이 고맙다. 물론 자식을 낳아 기를 때는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키울 때는 자식이 많아 몇 배나 힘들었어도, 서로 의론하며 큰일을 치르는 품새가 대견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남편의 칠순이 지나고 여름휴가를 틈내어 작은 섬 한적한 어촌으로 자식들이 우리 내외를 초대했다. 대단한 위력으로 온다던 태풍도 스쳐가고 피서객들도 떠나버린 섬은 한산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파도와 시원한 바람만이 남아 우리를 반겨 주었다. 펜션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위들까지 법석이다. 주인공은 먼발치에서 바다나 구경하고 있으란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지금까지 음식을 하는 자리에는 언재나 내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변방으로 나서는 장수처럼 희비가 엇갈린다. 이제 시작이다. 자식들과 나의 자리가 이 선에서 서서히 바뀌어 감을 실감한다. 왁자지껄한 시간도 지나고 밤이 되어 모두 바닷가로 나왔다. 오랜만에 딸들의 손을 잡고 건너편 바다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딸들도 불혹지년을 맞았으니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도란도란하는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구름 사이로 나온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황홀한 기분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달빛에 흠뻑 젖어서 딸들과 같이 즐기는 밤바다의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웃음으로 말없이 따라주는 사위들도 고맙고 감사하다. 칠순을 넘어 팔순이 되어도 건강이 허락해 준다면 지나온 세월보다는 좀 더 멋지게 꾸리고 싶다. 서산으로 넘어 가고 있는 저 달이 초승달에서 만월로, 또 그믐달로 기우러지는 자연의 순리를 한 번 더 가슴에 새긴다. 나 또한 그 이치를 알고 살아간다면 한 평생이 무에 그리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