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에서 저자/이정순

소장님 어디쯤에서 무얼 하시고 계신지 못 뵌 지가 1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소장님의 손때가 묻은 장갑과 낡은 운동화까지 유품이 되어 있는 이 마당의 저편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이 글을 씁니다.

마당 너머 바다는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요. 소장님이 쌓아 둔 자연석은 아직도 쌓여 있는데 나 보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라던 그 말씀을 기억하지만 지금 저는 소장님 계시지 않는 이 집의 이 돌을 가져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소장님이 사셨던 이 빈 집에는 기르시던 고양이도 떠나고 없고 나무들만 아름드리 자라는 빈집을 나는 이렇게 무시로 드나듭니다. 여기 그늘 아래 앉아 제 지난날의 회한이나 그리움 속에는 언제나 소장님도 함께합니다. 저더러 어떠한 일을 하고 살더라도 글 쓰는 일만큼 잘해낼 위인이 못 되니 글을 손에서 놓지 말라던 그 부추김이 지금 제 글의 키 높이가 이만큼이나마 자랐습니다.

글을 쓰는 절차도 배우지 않고 호부터 지은 사람을 걱정하며 개탄해 하시던 소장님의 음성이 문득 들리는 듯합니다. 이름이란 스스로 새기지 않아도 행적에 따라 후세 사람들이 기억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저는 늙어가는 이 길목에서 어찌하여 이리도 세상사가 복잡하고 자신이 없는지 참 모를 일입니다. 20여 년 전 글벗으로 만나 부모 자식지간 만큼의 나이차를 건너뛰고 이래 써야한다 저래 써야 한다고 논쟁을 벌이던 시간을 추억합니다.

이론보다 실천을 토론하며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을 남길 필요가 없다는 방향에서 우린 뜻이 참 잘도 맞는 글벗이었지요. 하지만 저술은 계속 이어져 책의 홍수 속에 살지만 지금은 독서나 사색보다 검색의 시대를 산답니다. 저마다의 주장과 사연이 많아 선택의 어려움이 있기는 해도 호기심 많은 제게는 풍성한 문화 혜택이라고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합니다.

학문의 목적은 식견을 높여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판단을 위한 것이지요. 고상한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헛것이라고 우린 목소리를 높였지요. 양반들에게 경만 읽게 하지 말고 몸소 마당을 쓸고 꽃에 물을 줘 봐야 한다는 제 말에 호방한 웃음으로 맞장구 쳐 주던 소장님이 그립습니다. 머릿속 만리장성보다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손이 더 소중하답니다.

소장님께서 병환이 짙어질 무렵 걸음을 뗄 때마다 발목에 쇠뭉치를 단 것 같다했을 때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게 낫지 않느냐는 농 섞인 말을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들어 무거운 게 아니라 젊었을 때와는 조금 약해진 대로 가야한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앞으로는 이 빈집으로 덜 오고 싶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누구도 기억나지 않는 듯 그리 살고 싶습니다. 때맞추어 집 뒷산에 운무가 산허리를 어루만지니 이 일을 어찌할까요. 부드러운 바람이 낡은 처마 아래 풍경을 깨웁니다. 소장님의 다혈질적인 고함 소리도 함께 들으며 허리를 곧추세웁니다. 온기 없는 빈집보다 변화무쌍한 자연과 살가운 사람을 찾아 이제 떠나기 위해 바로 일어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