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석

갈바람이 인다. 침엽수 옆을 조용히 빠져나온 바람은 플라타너스를 만나자 괴성을 지르며 본색을 드러낸다. 느닷없는 침입에 이파리들의 동작이 크다. 견디다 못해 커다란 이파리를 포기하고 만다. 큰 이파리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하여 바람이 온순해질 리 없다. 밀고 다니며 제 힘을 자랑하던 바람은 시궁창으로 빠져드는 가랑잎의 꼴을 보고서야 자리를 뜬다.

창가에서 물끄러미 바람의 행렬을 지켜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밀친다. 느려터진 바람의 꼬리가 나를 끌어안는다. 반갑다는 건지, 삼켜버리겠다는 건진 모르지만, 끌어안는 힘이 느껴진다. 실없이 새어 나온 웃음에 민망하여 바람에 안긴다. 그리고 갈바람의 유랑에 동참한다. 플라타너스 잎의 마음이 이러지 싶다.

오랜만에 뭍으로 나왔다. 업체와의 만남은 의외로 간단히 끝났다. 만나기 전에는 복잡한 일로 많이 고심하였는데, 우리의 소통은 너무도 쉬웠다. 상대의 생각은 내가 예측한 바보다도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 배려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그로 인하여 내겐 생각지도 못한 여유가 찾아왔다. 바쁜 일상 속에서 단 한 번 경험하지 못한 단풍이 먼발치에서 유혹한다. 청남대는 처음이다. 더러 친구들이 청남대의 단풍을 입에 담아도 실지로 보지 못한 것이어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는데 좋은 기회를 얻었다.

청남대. 나랏일로 지친 대통령의 휴식처. 대청댐의 품에 있다. 앞으로는 넓은 호수가 있고, 주위로는 빼어난 경관과 골프장이 마련되어 있는 곳. ‘대통령 별장’이 말해주듯, 나름 경관이 빼어날 것으로 추측은 했어도 이렇게 단풍이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보아온 단풍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면 믿어 줄까. 호수의 물을 배경으로 짙게 몰든 단풍은 너무도 선명하고 찬란하다.

갑자기 차가워진 물의 영향일까. 이렇게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갑작스러운 기온의 변화 탓이라는 상식을 알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낮의 온화한 기온이 밤이 되자 호수의 물로 인하여 크게 떨어지고, 이파리들은 떨켜로 수분이 차단되면서 마침내는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게 된 것이리라. 물가 벤치에 앉아 단풍의 패션에 빠진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단풍잎에 끌려 나무로 다가간 것은.

먼발치에서는 붉으면 붉은 것으로, 노랑은 노란 것으로만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게 아니다. 붉음 속에 노랑도 있고, 다홍도 있다. 노랑 속에는 주황도 있고, 다색도 있다. 하나의 색으로 빛나고 있지만, 실은 여러 색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린다. 차창으로 스치는 숲정이의 단풍이 칙칙하다. 어디 하나 맑은 곳이 없고 지저분하다. 새 옷을 갈아입은 게 아니고 누더기를 세탁도 하지 않고 걸친 꼴이다. 가만히 바라보니, 모두가 제 색깔만 고집하다 말라버렸다. 낙엽이라기보다 가랑잎이다. 청남대에서 바라본 단풍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 조화를 추구하던 단풍. 승용차가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로 오는데 눈에는 한결같이 말라버린 가랑잎뿐이다. 머릿속에는 청남대의 아름다운 단풍인데…. 문득 상념에 잠긴 김유신을 천관녀의 집으로 데려간 말이 생각난다. 

내 뜻과는 무관하게 칙칙하게 말라버린 가랑잎 사이로 나를 끌고 가는 승용차. 어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라 성화다. 자기만을 내세우다 말라버린 가랑잎. 그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래, 현실을 무시하고 오늘을 살아낼 수는 없어. 저 고집쟁이들을 초등학생들 교실로 끌고 갈 수는 없을까. 교실에는 봄에 입학한 꼬마들이 많이 성숙했다. 진행자에게서 발언권을 얻어 말한다. 이야기도 조리 있고, 상대를 배려한다.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을 막아서거나 잡아채지 않는다. 이 교실을 어른들에게 견학시키고 싶다. 늘 자기만이 옳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는 철저히 귀 틀어막는 어른들. 다른 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소리 지르는 어른, 순서도 모르고 아무 때나 소리 지르는 어른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배려하고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