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1년을 넘기는 싸움으로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그들을 둘러싼 반짝거리는 방패를 든 경찰은 그 싸움의 결과를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는 소년 빌리(제이미 벨)의 눈을 통해 그 지치고 폭력적인 현실을 슬쩍 슬쩍 보여준다.

빌리는 그런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하물며 노동계급과는 더욱더 어울리지 않는 발레에서 자신의 희망을 찾는다. 가정의 절대적인 지원(당연히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발레는 노동계급의 아들, 더구나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의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갑갑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금지된 열정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빌리의 재능을 본 아버지는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작업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큰아들과 부딪치게 된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협상 후에 일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한다. "정말 미안하다. 우리는 끝났지만 빌리한테는 기회를 줘야 한단 말이다." 파업에 동참하는 사람도, 슬그머니 작업장에 들어가는 사람도 똑같은 노동자다. 그런데 정부의 분리정책은 같은 사람들 속을 교묘히 가르며 아픔의 골을 만든다(나를 비켜간 칼날이 언제라도 부메랑처럼 내 등 뒤를 찍는다는 '상식'은 항상 잊혀진다). 심지어 같은 가족에게마저도.

그런 현실에서 싸우면서도 이들은 희망을 품는다. 광부들은 그 어려운 현실에도 빌리를 위해 모금을 한다. 하지만 돈은 턱없이 모자르다. 결국 빌리의 아버지는 아들의 시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의 유품을 팔러 전당포로 향한다. 때마침 그 전당포 옆엔 광부들을 돕자며 뱃지를 파는 사람이 서 있다. 아버지는 잠시 갈등하지만 아들의 미래를 선택한다. 지치고 답답한 현실을 견디려면 희망이 필요했기에, 자식에게 똑같은 삶을 되물려 줄 수 없기에 그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을 처분한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빌리는 마냥 기뻐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약자들의 삶이 항상 그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아들의 합격소식을 알리러 간 아버지는 노조가 싸움에서 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52주간의 싸움이 허사로 돌아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오랜 노동의 경험만큼 좌절하지 않고 현실을 버틴다. 힘들면 다시 돌아와도 되냐는 빌리의 물음에 아버지는 "농담하냐, 네 방 벌써 세줬다"고 답한다. 대중은 웃음으로 힘든 현실을 버티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빌리를 보낸 뒤 아버지와 큰아들은 다시 캄캄한 탄광 속으로 내려간다.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와 큰아들은 빌리의 공연을 보러 으리으리한 극장을 찾는다. 아버지는 무대 위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린다. 빚을 내서 왕립발레학교에 보낸 자신의 결단이 옳음을 증명해서일까? 자기 아들만큼은 노동자라는 신분을 벗어났기에 기뻤던 걸까? 그 눈물의 의미는 뭘까?(이 질문에 대한 답은 뒤에 얘기하자)

작년 연말 나는 한 사람의 눈물을 봤다. 퀭한 작업장에서, 캄캄한 극장에서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방송과 인터넷에서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그 눈물을. 많은 사람들이 그 눈물을 '희망'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악명높은 영국의 대처와 같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점차 닮아가고 있다. 나는 1987년 7, 8, 9월 사람들의 마음 속을 뜨겁게 달궜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불과 17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파업이라는 무기를 노동자들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는 더 짧았다.

이제 겨우 사용법을 익혀가나 했더니 '벌써' 지나치다며 멈추라 한다.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사회를 차갑게 식히며 사람들 사이에 골을 판다.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이기주의'라며 비난하고 왜곡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듯이 파업은 노동자들에게도 힘겨운 싸움이다. 여유를 누리며 한가하게 보내는 싸움이 아니라 거리를 누비고 때론 경찰의 폭력에 피 흘리는 두려운 싸움이다. 패배할 수도 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힘든 싸움이다. 사실 파업이 길어질수록 어려운 것은 기업주가 아니라 노동자다. 기업주에게는 공적자금이네, 지원이네 하며 돈을 꿔줄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노동자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노동자들은 이기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이기심만이 아니라 자기 가족의 미래, 회사 동료의 미래, 미래에 노동자가 될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 그래서 파업의 경험은 강한 흔적을 남긴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인권관련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소위 '5공 청문회'를 통해 스타로 떠올랐다. 1991년 12월 27일 민주당 대변인을 할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의 임금인상억제 방침과 관련해 "이는 정부의 경제정책실패 및 왜곡된 경제운용으로 인한 부담과 희생을 노동자와 농민에게 전가하려는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발상"이라 비난했다. 1997년 1월 15일에는 무노동무임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원칙을 명문화한 노동관계법 개정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발표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나는 프랑스로 도망가 살고 있는 김우중을 체포했다는 소식이나 국민의 돈을 훔치고도 배 째라며 버티는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과의 '타협', 파업장에 투입된 공권력에 관한 소식뿐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연말에 봤던 그 눈물의 의미가 궁금하다. 그것은 아버지가 몰래 숨어들어간 작업장에서 빌리의 형을 보며 흘렸던 눈물이나 공연장에서 빌리를 보며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아니다.

빌리는 잘 자랐다. 끝장면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그의 몸짓은 고귀한 척 한가로이 쏘다니는 백조들의 호수가 아니라 그것을 조롱하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경계를 넘나드며 형식을 비웃는 백조들의 호수를 표현한다. 빌리는 아버지의 눈물을 잊지 않고 자기 분야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미래를 계속 막을 것인가!

하니리포터 하승우 기자eroha@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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