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갗을 타고 수맥을 찾아 하염없이 뻗어내리는 마알간 풍란의 뿌리는 하릴없는 시간 도둑이다. 풍란의 숨
능곡 이성보씨
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당당함은 군더더기 없는 삶 그대로다. 사람도 풍난처럼 당당하게 이름값하고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아니하다. 그래서일까. 조선시대 향약에 만좌명책(滿座名責)이란 형벌이 있었다.
향약은 지방수령이 정한 것으로 각 고을마다 백성들의 도덕적 해이와 전통문화 훼손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향약에는 규약을 어겼을 때 가하는 벌칙 등급이 정해져 있었고 형벌을 가하는 방법은 양반과 상민을 달리했다.
예컨데 아버지 앞에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상(喪)을 당한 사람이 술에 취해 주정을 하면 아주 상벌(上罰)에 해당됐다. 이때 신분이 상민에 속하면 태(笞)를 치고 양반이면 많은 사람 앞에 자기 이름을 써들고 앉아있게 했다. 이것이 바로 만좌명책으로 이 명예형벌은 향약이 가할 수 있는 최고 형벌로 삼은 것이었다.
지난 5월엔 전직대통령의 서거로 나라가 온통 패닉상태에 빠진듯했다. 전직대통령의 죽음, 이름 값하고 살기가 얼마나 어렵고 버거운가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이 일을 두고 주역에 나온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떠올렸다.
석과불식은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씨과일은 먹지 않고 남겨 놓아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 임기를 마치고 낙향한 대통령은 어쩌면 씨과일의 하나란 생각이 든다. 표적이니 편파니 하고 곱잖은 시선을 보내는 것도 씨과일을 잃은 안타까움과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어 본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사라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에 할 말을 잊는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칠난(七難)이 나온다. 즉 화난(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도난(刀難), 귀난(鬼難), 가쇄난(枷鎖難), 원적난(怨賊難)을 일러 '칠난'이라 말한다. 인간사에는 이 일곱가지 액난이 요동치는 까닭에 한시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화난(火難)이란 불에 의한 것으로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형 산불에서 보듯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불길은 보기만해도 무섭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불길이다. 화기(火氣)가 심장을 침범하여 생겼다는 화병(火病)은 우리나라 여성에게 생겨나는 질환이다.
수난(水難)은 물에 의한 액난이다. 홍수와 가뭄은 하나같이 물에 의한 액난으로 물은 그 성질이 음습하다. 그늘지고 축축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신을 망치고 남을 망친다. 마약이 그렇고, 불륜의 애욕이 그렇고, 은밀히 건네지는 뇌물이 그렇다.
풍난(風難)은 외형적으로 태풍이나 폭풍을 말하지만 성취에 대한 지나친 욕망 등의 번뇌를 의미하기도 한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일 때의 불안과 초조, 누구나 이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순리를 거스르는 조급함에서 일어나는 액난이 이 풍난이리라.
도난(刀難)은 흉기에 의한 액난으로 폭력으로 인한 희생이라 하겠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또한 도난이다. 착한 이웃으로만 알았는데 죄없는 부녀자를 납치해 죽이고 토막내어 암매장하는가 하면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폭력배도 있다.
귀난(鬼難)은 귀신이 씌인 액난이다. 예전엔 병에 걸리는 것이 모두 귀사의 작용이라 했다. 귀신이라니 21세기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런지도 모르나 지금도 귀신들린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헛것,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어리석어서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못하기 때문이다. 귀신은 어둠속에서 준동한다.
가쇄난(枷鎖難)은 송사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액난이다. 가(枷)는 목에 두르는 형틀이며 쇄(鎖)는 사슬이다. 죄악의 결과는 감옥뿐이다. 감옥을 두고 인간 죄악의 총체적 백화점이라 하던가.
원적난(怨賊難)은 도적 뿐 아니라 원수에 의한 액난이다. 도적은 꼭 밖에서만 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의 도적은 문단속을 잘하면 되련만 마음 속의 도적은 욕망과 번뇌의 문을 잠그지 않으면 막을 도리가 없다. 백만대군을 물리친 영웅보다는 마음 속의 번뇌를 물리친 자를 진정한 영웅이라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너나 없이 일곱가지의 액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모든 환난은 하나같이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다. 환란이 닥치면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반성보다는 원망이 앞서기에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치부, 허물, 마음 속 이기심 등 감출만한 것은 죄다 감춘다. 감추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이다.
남길 것만 남기고, 그것도 송두리째 드러내고 땡볕에 당당한 풍란을 본다. 덧칠하지 아니한 아름다움, 더없이 진솔한 아름다움을 풍란은 보여주고 있다. 애란인, 이름값 하기에 등이 휘일지라도 당당하여야 하리라.
6월, 풍란의 계절에 바라보는 하늘 빛이 너무 곱다. <거제예술랜드 대표/ 시조시인/ 전 거제문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