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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16]'오래된 미래'-황수원 거제박물관장"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정책도 무의미하다"
박춘광  |  geoje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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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11  05: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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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상남도박물관협의회장과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는

   
 
황수원 거제박물관장은 한국 박물관계의 중진인사로 한국박물관협회 정책위원장으로 한국의 박물관정책에 관한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는 문화계의 주요인물이다.

장승포 두모 출신인 황 관장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아버님은 남의 배를 타셨고, 어머니는 밭일 등의 품팔이를 하시면서 우리 7남매를 길렀다. 흉년이 들 때면 제일 먼저 양식이 끊기는 집이 우리 집이었고, 그래서 밥도 많이 굶었다. 아버님께서 어느 해인가 남의 배를 빌려 강원도에 오징어잡이를 가셨다가 오징어를 잡지 못해 완전히 빚만 잔뜩 안고 돌아 오셨는데, 그때 집이 경매 당하고 남의 집에 사는 꼴이 되었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집안에 웃음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길은 공부라도 열
   
 
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매 학기마다 받아오는 상을 보고 부모님께서는 대견해 하셨고 중학교는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부산에 돈을 벌러 나가라고 주위에서 권했다. 시험이나 쳐보고 나가겠다고 우겨 전형료를 옆집의 또래의 여학생에게 빌려 해성중학교에 시험을 쳤다. 다행히 수석으로 합격했고 ‘삼락회’장학생이 되어 3년간을 무료로 다녔다. 그리고 왠지 고향에서만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동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같은 학급의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그 집에서 기식을 하기도 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해서 수업 후에는 늘 도서관에서 살았다. 보던 책 한권을 다 읽고 늦은 밤 학교에서 걸어서 집까지 오는 1시간 정도의 시간은 책의 내용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장래를 위해 설계를 하기에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 2년여 정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도서관의 책들을 거의 읽었고 ‘책벌레’란 별명도 들었다.

‘가난은 불편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장차 법관이나 정치인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시기가 그 즈음인 것 같다.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하여 고시공부를 하기 시작했으나 등록금도 문제였고 잠 잘 곳과 식사가 문제되었다. 집안의 사정을 뒤로 하고 무작정 서울로 가서 시작한 공부라 집안의 뒷받침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학교의 고시원(사마헌)에 적을 두고 빨리 이 공부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3학년 때. 그해 겨울 하숙비가 몇 달 밀려 도망치듯 하숙집을 나와 학교 고시원에서 밤을 지 샐 요량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수위아저씨가 밤이 늦었으니 퇴실하란다. 그때는 부탁하는 것도 쑥스럽고 하여 그곳에서 나왔다, 막상 나와서 겨울밤을 지샐 생각을 하니 참 한심하기도 했다. 돈이 있을 리 없었고, 호주머니의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이 밤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교문을 나섰는데 저만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어 가 봤더니 같은 과의 친구가 술
   
성대 사마헌(고시반)앞, 옆에는 이혁우 판사
을 마신 후 언쟁을 하고 있었다. 싸움을 말리고 그 친구 하숙집에 같이 들어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 식사까지 하고 나왔다. 등록금을 친구가 대납한 경우도 있었고.... 돌이켜 생각하면 참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군에 입대하고 나서 살도 찌고 살 만 하다라는 생각이 다 들었을까!

4학년 1학기 마지막 등록금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은 과의 친구가 대납해주기도 하였다. (그 친구는 지금 호남 정유의 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 때 그 친구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수원이 니가 꼭 대법관이 될 거라고 믿는다. 출세하거든 잊지 말거라이.’ 그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지
   
강원도 원주에서 군복무 시절
금도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4학년을 졸업하고 바로 입대를 해버렸고, 그 후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3학년 때 부터 술렁거리던 정가가 4학년이 되면서 학교는 연일 데모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그때 가까운 친구가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책을 들고 앉아 있기는 하였으나 머릿속에 들어 올 리도 없었고, 몇 차례 데모행렬에 끼어 참석했다가 시험이 임박하여 책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와 문동골짜기의 조용한 집을 찾아 시험 준비를 했다. 이듬해 초봄에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5.18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육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해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공부를 계속하고는 싶었으나 연로하신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 때문에 고시에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우중회장과의 비행기안에서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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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입사와 김 우 중회장과의 만남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대우그룹이었고, 서울을 떠나 고향에서 일을 하면 빨리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고향으로 왔다. 대우조선공업 주식회사의 종합기획실과 경영 관리실에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이 시기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업의 기안을 하는 일부터 중역회의의 뒷바라지를 하고 회의 결과를 정리하여 전 사업장에 배포하고, 사규를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일과, 생산계획과 미래전략사업 등에 관한 회의 등도 전담하면서 자연스럽게 김 우 중회장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 회장과의 관계는 2년 후 대우조선을 떠난 후 깊은 인연으로 남게 된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 둔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부친의 급작스런 병환으로 그만두고 수산업에 손을 댔다. 말이 좋아 수산업이지 배 한척으로 피조개를 파서 진해에 가서 파는 그런 사업

   
거제사회연구소 개소식에서. 그 후 연구소는 「거제개발구상」,「주민의식 실태조사」등 10여가지 과제 수행
이었다. 바다에 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억센 선원들을 다루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것도 잦은 사고 후 태풍으로 결국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이 때 부터 3년 정도는 정말 어려웠다. 조그만 서점을 인수하여 책도 팔고 남을 가르치는 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대학을 다니는 후배들이 자주 찾아오곤 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밥 먹으면서 밤새도록 사회에 관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토로하곤 하였다, 뜻있는 몇 몇 지인들과 YMCA거제지회를 만들고 농촌봉사활동과 노동자나 소외계층의 법률상담을 통해 또 다른 삶의 현장을 보게 되면서 정치를 통한 사회의 변화가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여러 집회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기획하는 일도 하였으며, 대우조선의 노동조합결성과정에 생겨난

   
 (거제도 최초의 「양담배 불매운동」시위, 앞에 선 이가 전 도의원 김경언씨)
이석규씨의 분신자살사건의 장례대책위원회의 자문으로 참석하면서 당시 재야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이상수씨 등과 만났고, 그 후 문익환 목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등과도 만났다.

13대 대통령 선거당시에는 양김의 단일화를 주장하면서 거제전역의 대선 조직인 공정선거시민협의회를 조직하고 선거감시단을 민주산악회와 거제지역의 민청조직과 결합하여 발족하였다. 그러나 선거막판까지 단일화 되지못한 두 후보(김영삼, 김대중) 때문에 선거는 패배로 끝나고, 이후 지역민주화 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였다. 양담배 불매운동, 지심도 국방과학연구소설치 저지운동 등은 그 당시 우리가 지역의 여러 단체와 공동으로 했던 일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때 만났던 몇 몇 사람들과 사회주의 논쟁을 하게 되고, 성숙된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지심도 군사시설 결사반대」란 피켓과 어깨띠를 두르고 시위에 참가했을 때의 한 장면
도 못한 상태에서 사회주의운동은 지나친 모험이라는 생각과,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 노동자 중심의 폭력혁명을 수단으로 하자는 의견에 동의 할 수 없었다. 그 외 여러 가지 이유로 차츰 노동운동계와 거리를 두고 있던 중 노사를 아우르는 조직인 장승포시 발전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얼마 전 치른 대선에서 단일화실패의 원인이 지역의 민주역량이 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이후 지역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좀 더 지역민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지역의 폭넓은 의견도 듣고 노동계층과 자영업자 혹은 상인들의 입장을 서로 조화롭게 이끌어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사가 분열하고 지역민과 회사가 이렇게 갈등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지역발전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위의 원인이 무엇이며, 우리사회에서 어느 정도가 용인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해야 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지심도」되찾기 운동 중, 친구 박 기용 서울치과 원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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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생각이 교차하였지만 용기를 내어 그 직을 수락하였고,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조정하려했으나 그해 6월 10일 대우조선 노.사 양측에 시민의 입장을 전달하려는 집회에서 불의의 폭력사고가 터졌다. 물론 이 행사는 당시에 격정적인 사람들에 의해 기획된 것이었으나 동기는 단순하였고 순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현장을 모니터링 하던 노조 측의 인사가 시민들을 보호하기위해 안내를 하던 사람들과 충돌이 빚어졌고 뜻밖의 폭력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사태가 수습된 이후 더 이상은 어떤 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생각들을 양측에서 가지고 있는 한, 나는 내가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측은 계급이기주의를 내세우고 나아가 정치적인 진출로 사회변혁까지를 도모하는 반면, 자영업자나 일반서민들은 사회 안정과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원하였다. 더구나 거제도는 1950년 6.25전쟁이후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빨치산 활동과 보도연맹이라는 사건을 통한 양민학살사건도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노동조합의 붉은 깃발과 수백 개의 플랜카드나 만장등과 붉은 글씨로 써진 선동적인 문구를 혐오의 정도를 넘어 두려워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노동운동은 초창기에는 지역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역민들의 지지를 잃어갔고 정치운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노동자를 도울 수는 없었다. 돕지 않아도 노동조합을 통해 충분히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쟁취해 가고 있는 마당에 그 자리를 맴돈다는 것은 옳지 안다고 판단했다.  사업주가 쟁의가 발생하여 생산의 차질이 빚어지면 물론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파업이 장기화되면 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감당해야 한다. 노사의 협상을 통해 극단의 파업을 막았다 해도 그때까지의 임금은 지급한다는 조건을 반드시 협상의 문구에 넣게 되고 그것 역시 업주의 손실로 남게 된다.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원칙을 정하자고 해도 그것자체가 노동탄압이라는 논리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해결이 쉽지 않으면 사용자는 공권력을 빌려서라도 조업을 재개하기를 원한다.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이다.

얼마 후 회장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장기화된 파업 때문에 공권력의 투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공권력의 투입은 다시 파업으로 이어지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만의 안정이란 있을 수 없고 우리사회 전체가 안정되어야 이 사태가 종료될 것이라고 했다. 노

   
중국 해남성 「뢰우」성장과 계림의 기차안에서
동운동이나 민주화 운동도 하나의 흐름이나 바람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김우중 회장은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도 만나서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를 잇는 정권은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공권력이 부정한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는 한, 공권력 자체에 대항하는 것은 정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공권력의 위압에 눌려 잠시 수그러들더라도 다시 재연될 개연성은 너무나 컸다.몇 차례 사건들은 일어났지만 회장은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끈기 있게 기다렸고 노동조합을 이끄는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여 오늘의 대우조선 해양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박문일」 연변대학 총장과 백두산에서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김우중 회장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김 회장은 황관장에게 넓은 세계를 둘러 볼 것을 권하였다.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이던 사회주의 국가이던 그리고 아프리카던 유럽이던 폭넓게 세상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할 일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중국, 체코, 동서독과 리비아, 나이지리아, 이란,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 소위 제3세계나 공산권과 자유진영을 다니면서 때로는 회장과 동석하여 사업을 위한 미팅에도 참석하고, 대우가 세계 곳곳에 벌여놓은 사업체를 견학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그는 다시 중국에 들어갔고, 계림에서 해남성의 뢰우 성장과 계림시의 원애추 시장 등과 함께 저녁을 하면서 대우의 계림시에 대한 투자협정을 맺는 것도 보았다. 그 후 김 회
   
늘 친형같다는 「박찬종」 전 신정당 대표와
장의 부탁으로 연변대학의 박문일 총장을 만났고 그와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남한을 알고 싶어 하고 남한을 동경하는 많은 조선족이 있다고 하면서 적어도 중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하나의 이상이고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라고 하였다.

문화혁명을 겪은 후라서 지식인들은 자리를 잃었고 중국의 역사마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세대들이 앞으로 중국을 이끌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와 그 가치에 대해 관변학자들에 의한 왜곡은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얼마든지 행해질 것이라고 했다. 1991년에 오른 백두산에서의 감회는 아직도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고 했다. 먼 이국의 땅이라고 만 생각했던 북녘의 산하며, 말로만 듣던 두만강과 혜란강,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보았다. 여기에 우리의 조상님들이 묻혀 계시구나. 여기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 메이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추위에 떨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셨구나하는 생각에 눈물도 나고 발걸음이 멈춰지곤 했다.

거제사회 연구소의 설립과 지역사회 연구
그 후 거제도에서 다시 그는 김 회장을 만났고, 회사를 경영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좀 더 공부

   
중국 연태시의 지불구 「장추파」구장과 거제지역민간의 문화․경제 교류 설명회
를 하겠다고했고 옥포에 조그만 ‘거제사회연구소’를 차렸다. 연구소에서 처음 만들어 본 것이 ‘거제개발 구상’이었다.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종합해서 책으로 만들어 거제시와 청와대, 언론사 등에 보냈다. 당시에는 자료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때문이리라 생각한다는 것.. 이것을 만든 후에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부분적으로 게재하였다.

1994년경, ‘거제 2000년’이라는 제목으로 부산매일 신문에 거제도의 여러 가지 발전구상과 사회적인 문제들을 기고하고 있을 때 부산과 거제간의 다리를 놓으면 어떨 것인가 하는 문제가 몇 곳에서 나왔다. 그는 급히 일본의 세토대교 관련 자료들을 모으고, 부산발전연구원(당시 강영수 원장)에 가서 이 문제를 의논했다. (갈은 연구소장이라고 해도 레벨이 한참 다른데 좀 당돌하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산발전연구원장의 대답은 부산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는 사업인데 공동프로젝트로 하기에는 명분이 없다고 하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세토대교에 관한 책자들을 번역해서 읽고 마침 거제청년회의소에서 지역발전 대토론회의 발표자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문제를 정리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여론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판단 신문에 기고하는 한 편, 여론조사(당시 연구소에는 류영달 박사와 김정문 박사 등 사회조사연구에 능한 젊은 직원이 있었다,)를 하여 대다수의 70%정도의 주민이 찬성한다는 내용을 공론화 정치권에 전달하여 이 사업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연구소 사업을 통해 지역의물가문제와 의식실태조사 등을 조사 정기적으로 발표하던 중 고인이 된 향토사
   
서울대학교 김경동 교수의 「21세기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과제」주제 강연회를 열다
학자 윤의도씨가 건물을 짓다가 부도가 나서 준공을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서 박물관으로 개관할 것을 권했다. 유물도 없는 상태에서 이 역시 해본 경험도 없기에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김 회장이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건물을 인수해서 연구소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건물의 현황을 둘러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물이라 당장 입주도 안 되어 어렵다고 했더니 업주를 선정해서 완공을 해서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건물 2억5천만 원, 윤의도씨가 소유하고 있다는 유물가격을 5000만원으로 하여 토지와 건물과 유물의 구입을 했다. 이 중 부채는 2억 원으로 농협중앙회 등에 대지와 건물이 압류된 상태였고, 직접 윤의도씨 등과 다니면서 압류를 해제하고 거제문화재단 건물로 등기를 했다.

거제박물관 건립과 우리역사 연구
박물관이 없는 거제도의 현실을 고려해 박물관을 만들어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물이 문제였다. 윤의
   
 
도씨로부터 유물을 넘겨달라고 하여 정리해 보았으나 유물이 부족하여 고민하던 중 아주동에 사는 이철기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 집에 유물이 좀 있다는 것이었고 이후 거제전역에서 유물을 모으기로 하고 재단 이사들과 백방으로 뛰어다녔다.지금은 3000점정도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관 당시에는 300점 정도로 출발하였다. 연구소 일이나 박물관 일은 돈과는 거리가 먼 사업이었다. 일은 재미있었으나 가정형편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부모님의 병환과 아이들의 양육에 따르는 비용들을 감당하기도 힘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박물관장이라고 하니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집을 옮기라거나 돈도 좀 쓰라고 했지만 늘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시장선거 2번, 광역의원선거 1
   
멀리 해금강에 보이는 곳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번을 치뤘으니....... 집사람이 이혼하자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말도 듣곤 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잘 자라 주었고 (지금은 막내는 대학재학 중 군대에 가있고, 위의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다.) 후배 보증을 서 주었다가 보증 빚을 갚아준 대신으로 오지의 산비탈 산과 논을 대신 받았는데, 그것이 값이 올라 많은 어려움을 해소 하게 되었다.
황 관장 부부는 가끔 서로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기적이지요.’ ‘그래, 기적 같다.’박물관도 이젠 관람객 수도 늘어나서 예전보다는 나아졌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지자체나 정부의 관심도 늘어나서 활성화되고 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박물관을 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산업이나 정책에 깊은 관심과 다양한 정보들을 듣게 되었고, 정부의 정책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2005년에는 그간의 노고를 인정했음인지 ‘자랑스런 박물관인’이라고 하면서 문화관광부 장관의 표창도 받았다.

미완의 과제 - 그러나 시급한 과제
아직도 할 일은 많다. 그것이 우리 지역을 위한 것이든,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든 문화로 다듬어서 명품의 도시와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우리시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다.
수많은 문화산업의 종사자가 있고, 그들 모두 자기가 하는 일에 열중이다. 돈하고는 상관않고 그저 묵묵히 역사적 책무인양 평생을 바치는 분들이 많다. 이들에 의해 우리의 뿌리가 지켜지고 우리문화가 전수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뿐 만 아니라 미래의 한국을 지켜나가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기본적인 힘이 된다. 문화는 많은 것을 포용하고, 재창조해 내어야 발전한다. 그리고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되고 남겨두어야 후세의 살아있는 교본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은 우리의 역사나 문화의 바탕을 도외시한 현상의 문제에만 집착한다. 강한 한국, 품위 있는 사회, 선진 국가 한국을 만들기 위해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나 예술의 깊은 이해가 있는 이들이 그래도 정치의 한 부분을 지키고 있을 때, 오늘 우리가 보며 걱정하는 여. 야의 첨예한 대립이나 남북의 싸늘한 철조망을 넘어서는 유연함과 여유가 가능할 것이며, 평화와 번영이라는 두 개의 가치가 상존하는 샹그릴라가 건설 될 것이다.
(JC주관「거제도 발전 대토론회」에서 처음으로 「거가 대교」의 건설을 주장)

에필로그
다정하고 따듯한 심성
어릴 적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들께서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을 쉽게 좋아한다. 너무 그래서 표정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딱딱하다는 지적들을 한다. 동생들 둘을 잃고 난 뒤부터는 좋은 말은 자주 하려고 한다고.

어린 시절의 일화
어릴 때 염소를 키웠는데 학교가 파하면 뒷산으로 가서 염소를 풀어 풀을 뜯게 하곤 했다. 그런데 뒷산에 가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놀기도 하곤 하였는데 몸이 좀 약했던 그하고 친구들이 자꾸 싸움을 시켰다.
하루는 그 중 강단이 있는 또래 친구하고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친구의 코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울고 그도 겁이 나서 울었다. 그 길로 집에 내려와서 작은방에 숨었다. 한 삼십분 쯤 있다가 코피 터진 친구의 어머니가 집에 찾아와서 어머니를 찾더니 자기 아이 때린 당신 아들도 때려 코피가 나게 해야겠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잘못했다고 빌고 그도 꼼짝없이 방에서 나와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날 어머니한테서 처음으로 회초리를 맞았다. 그 뒤로는 고등학교 가서 두 번 정도 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싸워서 지지는 않았다.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
살아온 날들을 보면 진보적 정당이나 재야인사로 남아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제도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민주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회복 혹은 보완이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곤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것은 당시에 없다고 봤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한 적은 있으나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한나라당의 당직자로부터 입당권유를 받아 지금까지 당에 잔류하고 있다.

박근혜 의원을 도운 계기
17대 대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시에 후보에 대한 결정을 못하던 중 김기춘 전의원으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말을 바꾸지 않는 신뢰성과 겸손함, 여성이면서도 강한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박근혜 대표의 거제지역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았고, 나중에 박 대표의 특보가 되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고 다니던 때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변화였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다르더라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과 갈등을 넘어서 우리의 미래를 아름답게 다듬어야할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는 점이다. 갈등과 적개심이 아니라 조정과 타협, 협력과 상생, 관용과 이해가 절실하다고 본다고.그리고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는 이 땅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이기에 큰 틀에서 보고 지금도 포럼경남 비젼투게더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정치인이 되려고 하나
모든 일에 있어서 신뢰는 기본적인 바탕이다.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 되어야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뚜렷해야 한다고 본다. 국가나 지역사회의 미래를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서 상황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특히 문화나 역사, 예술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알고 이를 부흥시켜 선진국의 대열로 가는 촉매제로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모든 사업의 바탕에는 휴머니즘이 깔려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정책도 무의미하다. 사회적 약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인간다운 생존이 가능하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인은 따듯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요구하는 것이라 본다.

평소의 좌우명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인데 물이 유연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겸손하면서도 마침내 목적지인 바다에 다다를 수 있는 끈기를 가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인물
에이브러함 링컨과 호치민이다. 삶의 방식에 공감하기 때문이다.(검소함, 겸손함, 인내와 끈기 등)

종교
가톨릭

좋아하는 노래
선구자. 솔개. 도요새, 친구야 친구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박상규

좋아하는 음식
된장찌개. 회

기억에 남는 책, 영화, 그림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태극기 휘날리며. 전혁림 화백의 통영항

좋아하는 연예인
안성기. 멜 깁슨

앞으로의 정치적 포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처럼 큰 걸음을 걷는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훌륭한 후배를 찾아서 나라의 동량으로 키우고 언행이 일치한 정치인으로 기억 되고 싶다.

거제를 위해 당장 시급한 일
거제를 관광산업의 특구로 만드는 일이다. 관광의 소프트 인프라를 구축해야한다. 자연경관을 보여 주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이나 무용, 음악등 예능방면의 관광자원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 다음은 도로교통의 문제이다. 관광지라고 불릴만한 교통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몇 개의 결절점 역할을 하는 대형주차장과 관광지 진입을 위해 필요한 지선도로를 만들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개발하여 천천히 거제의 풍광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대형차량으로 관광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고용과 소득을 동시에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문화와 예술을 앞세워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도시로 만들면 관광산업은 크게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산업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기업체 자체에서도 살아 남기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예컨데 풍력발전소 같은 청정에너지산업, 해조류를 이용한 신 에너지개발사업 등이 그것인데, 이것과는 별도로 신약발명을 위한 제약회사와 연구소등이 필요할 것이다. 국제 물질 특허를 얻지 않고, 기후 변화와 관련한 신종질병에 대비하기 위해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지난번 신종 플루와 같은 난리를 겪고 약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도 끌려 다녀야 할 것이다. 그 외 산업다각화의 측면에서 IT, BT등 첨단 산업도 필요하다. 몇 년 전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온 분과 만나 얘기를 했는데, 거제도는 기온과 강수량 등의 면에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다. 거제도는 400㎢정도의 면적으로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토지의 효율적 이용계획수립이 필요할 것이다.

술과 담배의 정도
술은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꼭 필요하면 소주 1병 정도는 먹는다. 담배는 하지 않는다.

본인의 장기나 단점
전형적인 외유 내강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고, 일을 할 때 너무 급하게 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다.

가족관계
ㅇ. 처 : 김 정 이(52)
ㅇ. 자 : 황윤정(28.여), 문정(26. 여) 범휘(22.자)
프로필

본 관 : 창원 회산 (전참공 22대손)
출생지 : 거제시 장승포동 두모 421
주 소 : 경남 거제시 옥포2동 1565
종 교 : 천주교
취 미 : 원예. 음악 및 영화감상
외국어 : 영어, 독어, 일본어 (읽기가능)
학력:
장승포 초등학교 졸업
해성중학교 졸업
부산 동아고등학교 졸업
서울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 졸업
경력 : 부산 매일신문 칼럼니스트
한국 JC국제실 21세기위원회전문위원 역임
지심도 대책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거제지부 부소장역임
경실련 중앙위원 및 거제경실련 사회개발위원장 역임
거제 시민신문, 거제신문, 경남신문, 경남도민일보 등 칼럼니스트 역임
거제대학교 외래교수 역임
해성중학교 운영위원장 역임
장승포 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거제지역 고문
전국 최연소 무소속 거제시장 출마
한나라당 경남도 광역의원 출마
제 17대 한나라당 대선경선 박근혜 후보 거제시 선대위원장
제 17대 대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거제시 선대위원장
제 17대 대선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문화예술분과 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특별보좌관
현, 재단법인 거제문화재단 이사장
현, 거제박물관 관장, 거제사회연구소장
현, (사)한국 사립박물관협회 이사
현, (사)경남박물관 협의회 회장
현, (사)한국박물관 협회 이사(정책 및 법제위원장)
현, 거제 사랑의 집 운영위원장
현, 하나방송 시청자위원
현, 포럼 경남 비젼 투게더 공동대표

수상경력 : 거제개발대상(장승포 청년회의소),
2003년 신인문학상(문예와 비평/수필부문)
2005년 문화관공부장관 표창(자랑스런 박물관인 상), 등
저서 : 정든 거제, 정들인 사람(신문칼럼모음집)
연구보고서 : 거제사람의 의식실태조사, 거제지역의 유통구조 조사.
거제개발구상(거제도 개발계획서), 거제지역 청소년 의식실태와 비행, 등
기타: 항구미래21(요코하마 개발계획)번역소개,
선진농촌으로 가는 길(오오야마의 NPC운동번역소개),
거제발전의 방향과 방법(일본 세토대교의 소개와 거가대교설치주장)

   
고등학교 2학년 시절, 해운대에서 환경정화 활동 후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급우들과
   
고교졸업 사진
   
대학동기인 장상원(판사), 박우신(호남정유 이사), 박규호(한전 부산 본부장)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대모이셨던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태영 박사와 함께
   
국제 와이즈맨 행사에서
   
「마산 MBC」주관의 「바다로 세계로」행사에서 인사말
   
거제박물관대학 5기생들과 학동해수욕장 정화활동을 마치고
   
오래된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황금석씨, 황기영씨 등이 보안다
   
박물관대학 강의 중
   
「거제사랑의 집」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신춘음악회」수익금 전액을 「한국유니세프」에 기부. 음악평론가 탁계석씨, 한국유니세프 대외담당관 박동은씨
   
경상남도 문화원장 연수회에서 「거제의 역사․문화」강의
   
존경하는 진덕규 교수와 「거제박물관대학」강의 후 (좌로부터 최규협, 진덕규)
   
박근혜 의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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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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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생각 2011-11-04 16:31:26

    관장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거 같습니다.
    거제의 발전을 위해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큰일을 하시도록 멀리서나마 관심가지고 힘쓰겠습니다.신고 | 삭제

    • 白雲 2011-09-18 08:03:07

      황관장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옛 말에 고생 끝에 영화가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 그 꿈과 희망이 꽃필날이 올것 입니다.
      萬難死線을 넘은 장수가 꼭 필요한 때 입니다. 그 희망과 용기 잃지 마시고 거제를 위해서 나아가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열정을 쏟아주시기 바랍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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