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 시드는 생화 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는 조화를 더 좋아하던 사람, 인간의 손길로 아름답게 만든 조화야말로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던 예술지상주의자, 불멸의 '꽃'으로 기억될 시인. 거여 김춘수, 그가 떠났다.

11월 29일 오전, 지난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져 4개월 여 간 투병생활을 하던 김춘수 시인이 끝내 타계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있는 시들을 끊임없이 많이 발표하셨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좋은 시를 조금 더 남겨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참으로 아쉽다."
김춘수 시인이 부인과의 사별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조영서 시인은 스승의 죽음 앞에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스승의 시 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인은 예술지상주의자이셨다. 시는 언어 예술이고,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고인의 시론이었던 것이다."
그는 김 시인이 생화보다는 조화를 더 좋아했던 것을 회고하며 "'자연은 있는 그대로는 위대하지만, 예술은 아니다. 조화처럼 인간의 손질이 묻어나 아름다움을 얻은 것만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게 김춘수 시인의 예술관"이라고 덧붙였다.

릴케의 실존주의적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김 시인은 50년 대 전후 많은 시인들이 참혹한 현실을 노래했던 것과는 달리, 존재에 대한 인식론을 중심으로 시를 썼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여러 번 꼽힌 '꽃'도 당시 쓰여진 시다. 이후, 김 시인은 자신의 시가 관념에 사로잡혀 점점 난해해져 가는 것을 탈피하고자, 사물에서 존재관념을 제거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무의미시'를 썼고, '무의미시'는 차차 '언어해체의 시'로 발전했다 (부인과의 사별이후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의미시'로의 회귀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김 시인 평생의 시를 살펴볼 때, 시인 자신이 순수시라 평하던 초기의 시부터 무의미시로 일컬어지는 후기 시까지, 현실 상황에서는 한 걸음 물러선 내용과 형식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는 그를 동시대의 참여시인, 김수영과의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김수영은 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할아버지는 참여시인인 김수영 시인을 평생 당신의 마음속에 라이벌로 삼고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워낙 자신의 시에 대한 주관이 뚜렷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비판에는 끄떡 않는 할아버지이셨지만, 자신과 항상 비교되었던 김수영 시인을 마음에서 떨치지는 못하신 것 같다."

덕성여대에서 시를 공부하는 김 시인의 손녀 김유미씨의 회고이다. 평생을 '리얼리즘의 부재'라는 꼬리표를 떼낼 수 없었지만, 한 번도 '시는 시일뿐'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꽃'의 시인 김춘수 씨가 '풀'의 시인 김수영 시인을 라이벌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의미의 추구는 의미의 포기나 배제가 아니라, 의미의 유보나 은폐"라며 김춘수의 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시인이었기에 더욱 더.

김 시인이 이렇게 참여시인 김수영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질곡의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역사 앞에 무신경했다는 세간의 질타가 자리한다.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제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다."
지난 3월 문학 평론가 장석주씨가 시 전문 반년간지 '시경'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장석주 씨의 글은 그 동안 김 시인의 시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의 논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김 시인이 쓰러지기 일주일 전 제자들과의 오찬에서 "진짜 시인은 역사를 무시해야 한다. 릴케같은 시인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파리의 혼란 속에 살면서도 현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던 것과 관련, 고인의 시관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현실 도피? 그것은 폭력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시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은 문학관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한양대학교 국문과 이승훈 교수는 김씨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대해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현실을 노래한다는 것은 현실을 모방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리얼리즘을 극복할 때 새로운 것, 모더니즘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한 김춘수 시인의 모더니즘 시를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폄훼하는 것은 모든 예술이 현실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폭력'에 가깝다"고 강변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김 시인의 '애인'이라는 놀림을 받을 만큼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노향림 시인 역시 한국시단에서 일어났던 김 시인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평가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유명 평론가 김아무개씨가 한 발표회에서, 예술에서는 민족주체성에 대한 천착이 중요하다며, 그 기준으로 고인의 시를 폄훼한 적이 있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 역시 김춘수 시인의 시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정주 시인에 대해서 '친일파로 몰리고는 있지만, 그 친일 행적을 뛰어 넘을 만한 시들을 남겼다면 그의 작품들은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말이 되는가?"
그리고 노 시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고인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를 쓴 사람이다. 그렇다면 고인의 작품 역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논리에 기반 한 건전한 비판은 나쁘진 않지만, 단편적인 잣대로 그의 시를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노 시인의 역사적 고백,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김 시인의 지인들이 고인의 죽음 앞에서 교수, 시인협회 회장 등 화려한 그의 이력을 소개할 때, 항상 그들을 멈칫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신군부 시절이었던 81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분했던 부분에서이다.
장석주 평론가가 "김 시인은 현실 정치에 대해 초연하거나 순수하지 않았다"며 그를 "부르주아 순응주의에 충실한 몽상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국회의원 이력에 기인했다.

"고인이 영남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위에서(정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거절을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중, 이미 고인이 국회의원 후보직을 승낙했다는 기사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시대의 희생자였고, 당시로서는 당신께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셨던 것 같다."
조영서 시인의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는 세상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기력한 것이다. 아마 김 시인께서는 그것을 느끼고, 좋은 뜻을 펼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김 시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국회의원 수락 당시 상황을 설명했고, 한양대학교 이승훈 교수 역시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로 다 전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정치를 통해 전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김 시인의 자의적인 국회의원직 수락에 무게를 실었다.

81년의 선택이 자의에 의해서였는지, 타의에 의해서였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이제와 그것을 구분하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아무리 지워내고 싶어도 김 시인은 이미 신군부 시절의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명단에 올라 있으므로.

김 시인은 당시의 선택으로 자신의 시를 아끼던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아픈 비판을 화살을 맞아야 했고,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까지 자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돌아가신 후, 고은 시인이 미당의 친일 행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건을 보시며 고인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 아마도 당신의 사후에도 신군부 때의 국회의원 이력이 무덤을 더럽힐까봐 두려우셨던 것 같다."
김 시인의 제자인 박정남 시인은 미당의 죽음 뒤 스승이 받았던 충격이 참으로 컸다며, "고인은 역사 의식을 중시했던 80년대엔 많이 위축돼 계셨다. 그나마 90년대에 이르러 자신의 역사적인 콤플렉스에서 조금 벗어나셨는데, 서정주 선생님의 죽음 뒤 세상의 싸늘한 시선에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고 고인의 과거 심리상태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시인은 김 시인이 타계 전, 대구의 문학강연회에서 "시인은 시인으로 평가되어야한다"고 강조했던 것을 들며, "아마도 자신의 사후에 있을 평가에 대한 자조로 해석할 수 도 있겠다"고 말했다.
노향림 시인 역시 10년 전, 김 시인과 함께 한 시인 모임에서 고인이 자신의 국회의원 경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현실에선 못도 제대로 못박으셨던 당신, 그곳에서는 시만 쓰세요!

김 시인의 부인이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벽에 못을 좀 박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 시인이 망치질을 하는데 너무나 서툴자, "현실에서는 못도 하나 못 박으시네요. 당신은 시나 쓰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이 얼마나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런 그가 세상사의 혹독한 폭풍우에 심하게 흔들렸고 참 많이 괴로워했다.

이제, 김춘수 시인은 추운 겨울을 못이긴 '꽃잎'으로 조용히 떨구어졌지만, 그의 불멸의 '꽃'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인으로서의 삶 혹은 그의 시 앞엔 각기 다른 관점의 평가들이 계속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한 생을 살다간 김춘수 시인, 그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그의 몫으로 남았다. 부디, 편안하기만 할 그 곳에서는 현실에서 오는 어떠한 갈등도 느끼지 말고, 그저 원하는 '시'만 쓰시길...
 <디지털 '말'김선영 기자 bono1523@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