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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성
차 은 혜
모 방송에서 ‘남극의 눈물’을 방영했다. 영하 오륙십 도의 혹한 속에서 찍어 보내준 화면속의 광경. 방영이 종료되고도 한동안 온몸이 얼어붙은 듯이 추웠다. 따뜻하고 포근함이나 찡한 감동보다는 안타까움만이 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겨울이 오면 남극의 모든 생명체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유일하게 황제펭귄만이 더 깊숙이 남극으로 찾아든다. 그들만의 생존방식이다. 살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방법.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방법, 또한 거스르거나 반항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무력함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긴다.
가장 접하기 힘들다는 황제펭귄이 알에서 부화하여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인간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부화할 때까지 몸속에 지니고 지낸다. 수컷은 가끔 눈을 먹을 뿐 다른 것은 전혀 먹지 않는다. 먹을 수도 없다. 알을 품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알을 놓치면 금방 얼어 버리기 때문이다.
암컷은 바다에 나가 그동안 쇠약해진 몸도 추스르고 영양을 보충한다. 몸속에 새끼에게 먹일 고기도 저장해 돌아온다. 새끼는 부화해 나오면서 어미와 아비의 사랑으로 성장해간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삶의 방법을 터득해간다. 부모와 새끼가 서로의 목소리를 인식하기 위해 끝없는 울음을 반복한다. 그래야 어미 펭귄이 제 새끼에게 먹이를 줄 수 있다. 수 만 마리 속에 제 짝과 새끼를 찾아내는 그들의 지혜가 신통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봐도 모두 똑 같이 생겼으니 제 새끼를 찾는다는 것이 불가하게 보인다. 그래서 펭귄들은 그들만의 방식인 목소리을 기억하게 하여 그 일을 해결한다.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온 어미는 제 새끼가 얼어 죽은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미를 기다리다 천적의 먹이가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새끼를 잡아가려는 알바토로스 같은 새들에게서 새끼를 지키려는 그들의 필사적 행동은 몸으로 막아 주는 것뿐이다. 다른 새들처럼 날카로운 부리도 없고 행동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그들이 자식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숙연해진다. 침략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새끼펭귄의 절박한 도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길 바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이것은 한편의 드라마다. 어쩜 그토록 생생하게 담았을까.
한참을 지켜보다 갑자기 나는 은아를 떠올렸다. 은아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그녀도 이곳에 먼저 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그곳에서 이곳 먼 이국땅으로 올 때는 나름대로 꿈을 갖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빈둥대며 놀고 술이나 마시고, 시어머니는 돈으로 사 온 종으로 여겼다. 시집식구 모두 같은 가족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녀는 은아가 세 살 되던 해 오월 소리 없이 떠났다.
술에 절어 가정은 나 몰라라 하는 남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간 것이다. 그녀는 딸 은아를 데리고 갔다. 평상시와 같이 내일을 약속하고 간 그녀가 난데없이, ‘저 도망 나왔어요.’ 하고 문자를 보내왔을 때 나는 할말을 잃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며 수많은 이야기로 그림을 그려 주었지만 먼 미래보다 현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나는 한동안 그녀가 비어 있는 공간에서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내가 준 그동안의 말이 허공으로 날아간 아쉬움보다 그의 절실함을 깨달지 못한 안타까움이 속절없이 밀려왔다. 최선의 선택이든 아니든 그녀는 둥지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그녀가 떠나고 오 개월 만에 남편은 죽었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의 끈마저 떨어져 나갔다. 아직도 아비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은아가 자꾸 가슴을 아프게 한다. 모든 것에 익숙지도 않고 영주권도 취득치 않은 상태에서 남편이 죽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이다.
아비펭귄이 새끼의 주검을 끌어안고 품안으로 넣으려던 모습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새끼를 잃은 어미가 얼음조각이 제 새끼인 줄 알고 품으려하는 모습은 눈물겨운 한 편의 드라마다. 절망의 늪에서도 제 아이를 버리지 않고 키우려하는 은아에미의 모성이 어미펭귄의 처절한 모습에 정확히 겹쳐지며 나를 일깨운다.
황제펭귄 새끼가 어미만큼 자랐다. 어미들은 하나둘 새끼들 곁을 떠난다. 어미들은 떠나고 새끼들만이 남았다. 그들도 부모처럼 또 다시 이곳을 찾아들며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이탈할 수 없는 하나의 순환의 질서이다.
남극에도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멀리 산란을 위해 떠났던 많은 펭귄들이 모여든다. 해는 항상 똑같은 모습이 아니고 같은 자리에 있지도 않는다. 조금씩 자리를 바꾸고 색다른 연출을 하며 떠오른다. 어느 날엔 구름에 가리어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고 또 어느 날엔 눈구름에 밀려 전혀 찾아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해는 또다시 뜬다. 그래서일까. 지는 해든 뜨는 해든 미련을 갖지 않는다. 오늘이 아니면 다음 날, 또 그 다음에도 만날 수 있으니 희망이다.
은아도 은아에미도 긴 터널을 지나 밝은 희망과 꿈을 향해 갈 것이다. 용기를 잃지 않고 인내하며 추위를 견뎌내는 황제펭귄처럼 당당히 살아갈 것이다. 힘들 때는 서로 허들링도 하고, 지혜롭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이 세상을 헤쳐 나갈 것이다.
*허들링(huddling) ; 펭귄이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몸을 밀착하고 계속 돌면서 바깥쪽에 있던 것과 안쪽에 있던 것이 교대로 자리를 지혜롭게 바꾸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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